1. 비밀소녀 / 😄🐸👒
"에고고."
비밀소녀는 방금 떨어질 뻔한 모자를 가볍게 움켜쥐었다. 그녀의 몸짓에 따라 긴 주황색 머리카락이 가볍게 흩날렸다. 작은 들꽃들과 리본이 달린 밀짚모자는 그녀의 머리색과, 그녀가 입은 엷은 소재의 원피스와 무척 잘 어울렸다. 비밀소녀는 그녀가 지금 서 있는 장소와 어울리지 않게 화사했다. 아무래도 초등학교 앞에서 이런 나들이 복장을 입는 사람은 드물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이를 이상하게 여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누구도 비밀소녀를 의식하지 않은 채, 각자의 순간을 보내기 위해 회색 콘크리트 길 위를 부지런히도 걸어갔다. 비밀소녀는 원피스 자락을 한번 탈탈 털고는, 초등학교 정문을 응시했다. [첫 등교를 환영합니다!]라고 적혀 있는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였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비밀소녀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비록 마스크를 끼고 있어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웃음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다. 아이들은 새로운 학교 생활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작은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짓고 있을 것이다. 아이들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가는 학부모도, 교문 앞에서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선생님들의 몸짓에서도 설렘이 느껴졌다. 교문으로 쭈뼛쭈뼛 걸어가는 아이의 신발 주머니에 달린 개구리 인형을 보며 비밀소녀도 그만 웃고 말았다. 개구리가 깨어나고 새싹이 피어나는 시기에 딱 맞는 인형이네요~!
그렇게 종이 울리고 마지막 지각생까지 쪼르르 등교하는 것을 지켜보던 비밀소녀는, 운동장이 완전히 고요해지자 그제서야 가볍게 기지개를 폈다. 이 장소에 들른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 그녀의 업무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느껴보라는 전임자의 조언은 꽤 쓸만했다.
"좋아요. 나도 이제 할 일을 하러 가야겠어요~."
경칩. 계절의 시작. 모든 만물이 겨울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하는 시기. 일을 시작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다. 그녀는 숨을 가볍게 내뱉고는 뒤를 돌았다. 밀짚모자 위에 또 다른 종류의 들꽃이 하나 퐁, 하고 피어났다.
'비밀소녀'라는 이름의, 새롭게 부임한 봄의 정령은 그렇게 조용히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2. 하쿠 0089 / 🧊🍋🐱
하쿠는 눈을 깜빡였다. 가족들은 10분 내로 오늘 할 일을 마무리하고 가겠다며 먼저 카페로 가 기다리라고 하였으나, 카페 카운터에는 '음료 1인 1주문 필수'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카페 안에서 하쿠가 섭취할 수 있는 음료는 없었으므로, 그녀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뒤돌아 밖으로 나왔다. 금전을 낭비하는 것보다는 바깥 구경을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결괏값이 도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쿠는 누군가가 카페테라스 테이블에 두고 간, 반쯤 먹다 남은 레모네이드를 쳐다보며 하염없이 서 있게 된 것이었다.
[240ml 기준 칼로리: 99kcal. 지방: 0.10g, 탄수화물: 25.87g, 단백질: 0.17g.
SYSTEM : 오늘같이 평균 기온이 높은 날에는 얼음을 넣어 온도를 식혀 마시는 것이 현명한 선택.]
그녀의 볼에 달린 금속의 파츠가 반짝 빛났다. 하쿠는 얼음이 서서히 녹기 시작하는 레모네이드를 분석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뜨겁고 선명한 햇살이 몸체를 일정 온도 이상으로 덥히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하쿠는 투명한 햇빛이 유리잔에 반사되어 자신의 눈을 찌르는 감각을 느꼈다. 조금 고통스럽고 안구의 분비물이 나오는 현상으로 이어지는 그 감각은.. 분명 '따갑다'일 것이다. 새로운 감각을 기억 메모리에 입력하고 있을 때쯤, 어떤 털뭉치가 부드럽게 그녀의 발치를 스쳐 지나갔다. 연구실 근처에서 자주 느꼈던 따끈한 온도와 익숙한 생김새. 하쿠가 정말 좋아하는 그 생물은..
"와#$@아! 고양^$이!"
하쿠의 목소리가 맑게 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복슬복슬하고 말랑한 털뭉치는 테라스 그늘 아래, 본인을 위해 준비된 작은 물그릇을 향해 도도하게 걸어갔다. 방금까지 분석하던 음료와 같은 계열의 색상 코드를 가진 고양이였다. 이런 색상의 고양이는 정말 오랫만에 만나는데! 레모네이드는 생각 회로 뒷전으로 밀려난 지 오래다. 하쿠는 냉큼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본격적으로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잠시 후, 허겁지겁 카페로 달려온 그녀의 가족들이 '아니, 더운데 왜 안 들어가고 여기 있어?!'하며 아연실색하게 될 것이라는 것도 모른 채.
3. 해루석 / 🎄🎆🧣
"아."
퇴근을 서두르던 해루석이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오늘의 날짜를 머릿속으로 떠올린 그는 이윽고 한숨을 내쉬었다. 크리스마스 이후 새해까지 이틀 정도 남은 애매한 연말이다. 그 말인즉슨, 손님들의 성화로 설치했던 저 어마무시하게 화려한 크리스마스트리를 철거해야 할 시기가 왔다는 것이다..잠시 고민하던 해루석은 내일의 자신을 위해 지금 가벼운 장식이라도 떼 두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움직일 때 힘드니까 외투는 벗고, 귀찮으니까 목도리는 그대로 두른 채. 해루석은 팔 소매를 걷었다.
안경에 비치는 크리스마스 조명들이 정신 사납게 반짝이다가 픽 꺼졌다. 그는 전원이 꺼진 조명들과 자질구레한 장식들을 떼어내 커다란 상자에 집어넣었다. 난방도 꺼졌고 영업 내내 바를 감싸주던 은은한 음악도 꺼져 조용한 가운데, 혼자 남아서 잔업을 처리하고 있노라니 조금 쓸쓸하고 적적했다. 해루석은 움직임을 멈추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크리스마스 선물 교환식 때 받았던, 붉은 목도리가 보드랍게 해루석의 얼굴을 감싸왔다. 그때는 참 재밌었지. 그의 시끄러운 동료들은 그가 혼자 있는 꼴을 도저히 못 보는, 아주 고약한 성미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다 먹지도 못할 만큼 잔뜩 차려진 음식들과 잔을 가득 채운 음료들. 탱탱볼처럼 여기저기 튀어 다니던 대화들과 와르르 쏟아지던 웃음들. 그러다가 불꽃놀이를 하겠답시고 까불던 몇몇이 가게를 홀랑 태워먹을 뻔도 했었지. 해루석은 피식 웃으며 상자 구석에 처박혀 있던 여분의 폭죽 세트들을 크리스마스 장식 위로 올려 담았다. 그 당시에는 정신없이 몰려다니며 혼자만의 시간을 간절히 바랬었는데. 막상 혼자 있게 되자 외롭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나도 참 청개구리 다 됐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채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장식을 절반 가까이 떼어냈다. 해루석은 뻐근해진 몸을 풀었다. 나머지는 내일 가게 오픈 전에 떼내면 된다. 그 후 트리를 창고 안에 집어넣으면 올해의 크리스마스도 완전히 마무리된다. 외투를 챙겨 입은 해루석은 마지막으로 조명을 끄고, 어둠에 휩싸인 가게를 돌아봤다.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조만간 이곳에서 또 다같이 모이겠지.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몰라 벌써부터 두렵고, 정신없고, 기대됐다.
그래도 역시 떠들썩한 날에는 이벤트가 있으면 좋지. 곧 있을 송년회 때 밖에서, 반드시 가게 밖에서! 불꽃놀이라도 하자고 제안해 볼까? 생각하며 해루석은 피곤한 몸을 택시에 실었다.
4. 소피아 / 🎥🔦🪛
"저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어떡하면 좋죠.."
그러게요. 어떡합니까? 제 눈앞에 서 있는 남자가 말했습니다. 그냥 툭 내뱉은 것 같지만 나름의 위로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었습니다.. 그래요. 저는 위로가 필요할 정도로 억울했습니다. 영화를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어 심야의 낡은 영화관을 찾았을 뿐인데, 직원이 그냥 홀랑 퇴근해버려 상영관에 갇히는 경험은 누가 해도 억울할 겁니다. 크레딧은 다 올라갔는데 조명은 켜지지 않고, 배터리 전원이 닳았는지 휴대전화도 먹통이고, 나가는 문을 두드려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순간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합니다. 맨 뒷 라인 좌석에서 영화를 보던 남자가 가까이서 보니 복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도 충분히 무서운데, "어, 뭐야, 안 열립니까? 직원 안 옵니까?" 하고 어둠 속에서 저에게 말을 건네던 순간에는 정말 기절할 뻔했습니다. 다행히도, 그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패닉에 빠진 사람을 도와줄 정도의 선량함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혹시 휴대전화 있으시면 신고 좀 해주시면 안되나요?!하는 저의 비명에 아이고..집에 두고 왔는데. 하고 말할 정도의 허당끼도요.
볼썽사납게 울먹이는 저를 보고 그 남자는 잠시 고민하더니, 옷 안쪽을 뒤적이기 시작했습니다. 뭐 하는 거지? 의문이 들기도 전에 남자는 저를 향해 무언가를 툭 건넸습니다. 한 손안에 쏙 들어오는 크기의 손전등이었습니다.
"이거 들고 문 쪽에 좀 비춰주시겠습니까?"
얼떨떨하게 손전등을 켜 문 쪽으로 갖다 대니, 남자는 또 어디서 꺼냈는지도 모를 드라이버를 들고 문을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장갑까지 꼼꼼히 낀 채로요. 어, 어디서 이런 물건들이 난 건가요?! 하고 묻자 아, 저 공대 출신이라 늘 가지고 다닙니다. 하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마치 이런 일이 일상이라는 듯한 태연 침착한 말투에 저도 모르게 '그런가...?'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무튼 경첩에 일자 드라이버를 갖다댄 그 남자는 이것저것 들쑤시는 듯 하더니, 금세 상영관 문을 여는 데 성공했습니다! 제가 감격하고 있을 동안, 와~밖이다! 그렇게 말한 남자는 나타날 때만큼이나 홀연히, 발걸음도 가볍게 사라져 갔습니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이 모두 허풍처럼 느껴지시는 게 당연합니다. 밤새 영화관에 갇혀 있는 끔찍한 경험을 하지 않게 도와준 은인의 이름도, 직업도, 그 어떤 것도 저는 모르니까요. 혹시 너무 피곤한 나머지 꾼 한 편의 꿈이 아니었을까, 저도 혼자 생각하곤 한답니다. 그 남자는 대체, 뭐였을까요?
5. 해루석 / 🕸🧸🔑
예전에는 상가였을 이 낡은 폐건물은 이제 텁텁한 먼지에 휩싸여 귀신이라도 나올 것처럼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바닥을 손가락으로 쓸면 시커먼 먼지와 돌가루 따위가 묻어 나왔고, 벽 틈새마다 거미줄이 촘촘히 쳐져 있었다. 해루석은 거미줄에 드문드문 박혀 있는 벌레 허물을 보며 가볍게 몸을 떨었다. 솔직히, 조금 무서웠다. 하지만 만일 이곳에서 물러선다면, 단서를 수집하기 위해 몰래 잠입한 체면이 살지 않는 법이었다. 딸칵 소리를 내며 작은 손전등을 킨 해루석은 본격적으로 폐건물의 구석구석을 살피기 시작했다.
"어우, 뭐야!"
눈앞의 풍경만 주시하던 해루석의 발끝에 푹신, 하는 이질적인 감각이 느껴졌다. 소스라치게 놀란 그는 팔을 휘적거리며 다소 우스꽝스러운 동작을 반복했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건만 조금 민망해진 그는 헛기침을 몇 번 하며 발끝에 채인 물건을 주워들었다. 정말 뜬금없게도, 그것은 갈색의 곰인형이었다. 흐음? 난데없는 불청객의 등장에 그는 잠시 눈썹을 찡그리고 고민하다가, 왼손에 들었던 손전등을 어깨에 끼웠다. 그러고는 자유를 찾은 두 손으로 앙증맞은 털복숭이 친구를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한정적인 양의 빛 아래서 살펴봐도 인형은 새것이라는 게 티가 날 정도로 깨끗했다. 방금 그가 밟은 부분과 바닥에 닿였던 부분 외에는 먼지 하나 묻지 않은, 누군가가 일부러 가져다 둔 게 틀림없어 보이는 곰인형. 불쌍한 어린 아이의 분실물이거나, 아니면 어린애같은 장난을 치고 싶었던 '누군가'의 농간이거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해루석의 손끝이 인형의 등 부분에 닿았다. 실밥이 유독 우둘투둘하게 꿰매져 있는 바로 그 부분에.
그는 망설이지 않고 양손으로 헐겁게 꿰매진 부분을 힘껏 당겼다. 북, 소리와 함께 인형의 등에서 솜이 튀어나왔다. 손가락으로 인형의 속을 헤집자, 차갑고 딱딱한 금속의 물체가 느껴졌다. 곰인형의 속에서 나온 건.. 작은 열쇠였다. 해루석은 손전등을 그대로 떨어뜨릴 뻔했다. 미친.. 볼에 싸하게 소름이 돋았다. 아마추어 사설탐정의 첫 쾌거였다. 그는 작은 성취감과 아득한 호기심을 느꼈다. 자신을 가지고 노는 듯한 이 수상한 녀석의 정체가 대체 무엇일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래. 한번 해 보자고.'
그는 이 유치한 장난질을 친 범인을 반드시 찾아내겠노라 다짐했다. 스산한 폐건물이 더 이상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손전등을 고쳐잡고 열쇠를 손에 쥔 그는, 다음 퍼즐을 풀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6. 캘리칼리 데이비슨 / 🌙🎉📞
캘리칼리 데이비슨은 크하하!하고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파티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탓이다. 오랜만에 마음이 잘 맞는 청년들과 보낸 즐거운 한때였다. 대머리 진상 손님의 정수리를 짝! 소리 나게 후려갈기고 쫓겨났다는 미용실 일일 알바 청년의 사연은 다시 떠올려도 기가 막히게 웃겼다. 발레파킹 일을 하던 자동차 마니아의 사연은 또 어떻고! 마냥 웃지 못하는 청년들을 격려하기 위해 한바탕 터트려 댄 폭죽 소리가 아직도 귀를 멍멍하게 울리는 듯했다.
아니, 폭죽 소리가 아닌가? 캘리칼리는 사무실을 날카롭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니 화면이 꺼져 있었다. 개인 스마트폰이 아닌 사무실 전화벨이 지금 이 시간에 울린다는 건, 새로운 일거리가 들어왔다는 뜻이다. 흐음, 그는 검지와 중지로 가볍게 턱을 쓸며 고민에 빠졌다. 그 사이에도 전화벨은 그가 받기 전까지 결코 끊기지 않겠다는 기세로 요란하게 울어댔다.
"……나야."
수화기를 든 캘리칼리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예상했던 내용들이 그의 귓가로 와르르 쏟아졌다. 죄송합니다…이건 급한 결재라서…실례를…하지만…따위로 이어지는 장황한 설명을 들으며 그는 아직까지 머리 위에 얹혀 있던 폭죽 가루들을 털어냈다. 더럽게 안 털렸다. 쯧, 그가 언짢다는 듯이 혀를 차자 상대방이 주춤, 하며 말을 멈췄다.
"아니, 자네 때문이 아니야. 계속 얘기해."
그는 상대방을 달래듯 대답하며 창문을 흘깃 쳐다보았다. 어둠이 몇 입 베어먹은 듯한 형태의 얇은 초승달이 하늘에 걸려있었다. 그렇구만. 완전히 파티를 끝낼 시간이었어. 캘리칼리는 한쪽 입꼬리를 씩 들어올리며 웃었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웃음이었다.
"그래. 지금부터 처리해 둘 테니 그렇게 알라고."
전화를 끊은 캘리칼리는 느슨하게 풀어뒀던 넥타이를 다시 당겨 맸다. 엉망이 된 테이블은 잠시 둔 채, 팔소매를 걷고, 장갑을 벗고, 큰 소리를 내며 기지개도 한번 쭉 폈다. 흥청망청한 상태로 돌아간 청년들은 지금쯤 자고 있으려나. 그들의 하루는 끝까지 파티로만 끝났기를, 그는 마음속으로 잠깐 기원했다.
"어디, 달밤에 체조 한 번 해보실까?"
캘리칼리는 밀어뒀던 서류철을 열었다.
7. 카르나르 융터르 / 🎫🚄📘
연신 덜컹이던 기차가 터널 안으로 들어섰다. 시야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카르나르 융터르는 읽던 책을 펼친 채로 무릎 위에 올려두고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터널이 끝나면,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겠지.' 그는 방금 읽었던 문구를 떠올렸다.
파란 표지의 책은 그가 가장 아끼면서도 자주 읽던 소설책이었다. 책을 들고 다니는 것이 번거로워 전자책을 다운로드해 읽던 그였지만, 이 책만큼은 종이로 읽는 맛이 있어 따로 챙겨 다니곤 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주인공이 횡단열차를 타고 긴 여행을 떠나는 장면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눈밭과 자작나무 숲의 풍경이 손에 잡힐 듯 선연하게 묘사되어 있어, 그는 언젠가 꼭 그 광경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야 말겠다고 다짐하곤 했었다. 이제서야, 보러 갈 수 있게 되었다. 카르나르 융터르는 여행을 즐길 수 있을 정도의 여유를 갖기 위해 노력했던 지난날들을 잠시 떠올렸다. 흠, 실로 커피 없이 보낼 수 없던 나날들이었지요. 떠올린 김에 그는 텀블러에 담겨 있던 커피로 약간 목을 축였다.
리드미컬하게 덜컹이는 기차는 적당한 속도로 움직였고 열차 안의 온도는 적절히 따스했다. 차분하고 아늑한 분위기에 그의 마음도 노곤하게 풀어지는 듯했다. 잠시 느긋한 순간을 즐기던 융터르는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이 아, 하고 짧은 탄식을 뱉었다. 주머니를 뒤적이다 그가 꺼내든 것은 다름 아닌 기차 티켓이었다. 이 티켓을 끊었을 때의 순간을 잊지 못하리라. 그동안의 스트레스가 모두 날아가는 듯한 그 해방감을. 그는 펼쳐져 있던 책에 티켓을 끼웠다. 책을 펼치면 거의 자동으로 그 장면이 펼쳐질 만큼 자주 읽었던 부분이라 사실 책갈피 따윈 필요 없지만, 그래도 굳이 티켓을 끼워 넣고 책을 덮었다. 소설 속 장소가 목적지로 적혀 있는 티켓을 책갈피로 사용하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낭만적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융터르는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책 표지를 가볍게 쓸었다. 이 순간을 보기 위해 달려왔으니 준비를 허투루 해서도, 한눈을 팔아서도 안 될 일이다. 가볍게 뛰는 심장이 느껴졌다. 좋은 컨디션과 상쾌한 머릿속. 여행을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오후다.
시야가 점점 밝아진다. 터널이 끝나면,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겠지. 그는 편안하게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창문을 바라보았다.
8. 뢴트게늄 / 🎈♠🐋
팔을 있는 힘껏 비틀어 꼬집어도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랬기에 뢴트게늄은 지금 본인이 꿈을 꾸고 있음을 알았다.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거대한 고래의 등에 타는 경험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는 자신이 걸터 앉아있던 고래의 등에 가만히 손을 댔다. 촉촉하면서도 매끈한 감촉이 전해져왔다. 다큐멘터리를 보며 혼자 상상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애초에 하늘 위를 날아다니고 있다는 점에서 이 고래는 '진짜 고래'가 아닌 게 분명했지만, 그래도 꽤 실감 나는 감촉이었기에 뢴트게늄은 신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연신 고래의 등을 쓰다듬었다.
단 한 명의 손님을 위해 순항하던 여객선이 가볍게 머리를 치켜들었다. 위를 좀 보라는 듯한 몸짓에 뢴트게늄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옅은 보라색을 바탕으로 연분홍빛 노을이 층층이 쌓여 오묘한 색을 띄었다. 그 사이를 유영하는 고래의 옆으로 색색의 풍선들이 날아올랐다. 철새 떼처럼 무리를 이룬 채 하늘 위로 올라가는 풍선은 말 그대로 '꿈속의 광경'처럼 보였다. 환상적인 절경에 그는 저도 모르게 와, 하고 가벼운 감탄사를 내뱉었다. 모든 것들이 그를 배려하듯 천천히,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지금 당장 꿈에서 깨어날 방도를 찾는 대신, 이 꿈속 세계를 조금 더 눈에 담아 가기로 결정했다. 잘 기억해뒀다가 나중에 사람들에게도 얘기해 줘야지!
주변의 모든 것들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풍선들이 모두 날아오르고 난 뒤, 하늘에서 팔랑팔랑 내려오기 시작하는 저 카드들도 그가 손만 뻗으면 쉽게 잡아챌 수 있을 정도로 서서히 떨어졌다. 아주 그냥 잡아서 봐달라고 애를 쓰는구만, 정말이지. 그는 피식 웃고는 방금 그의 볼을 스치듯이 떨어지던 카드 하나를 잡아챘다. 뻣뻣한 재질의 트럼프 카드였다. 카드를 뒤집자, 왼쪽 구석에 그려진 스페이드 무늬와 알파벳보다 카드 전반에 그려진 남자의 옆모습이 더 눈에 띄었다. 어디서 많이 본 익숙한 남자의 옆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짙은 피부와 녹색 눈동자, 눈 밑에 적힌 일련의 번호들과 턱에 촘촘히 자라난 분홍 수염까지 빠지지 않고 묘사되어 있는, 그 남자는…
그 순간 고래가 입을 벌려 소리를 내기 시작했으므로, 뢴트게늄은 그 포유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스페이드 잭. 원 아이드 잭이라고들 하지요. 카드를 들고 있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어떤 역할이든 해낼 수 있습니다. 아니 해내고야 마는 것이지요. 가장 극적인 순간에 빛을 발하는 비장의 카드. 이거 어째 누군가를 많이 닮은 카드지 않습니까?
당신이 누군가에게 그러하고, 지금의 내가 당신에게 그러하듯이.
그 순간 뢴트게늄은 꿈에서 깨어났다.
* 저의 글은 공지사항(https://mintlatteis.tistory.com/notice/1)을 언제나 준수합니다.
신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생각하셨던 캐릭터 해석과 다르더라도...예쁘게 봐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