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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

by 민토minto 2022. 11. 15.

* 저의 글은 공지사항(https://mintlatteis.tistory.com/notice/1)을 언제나 준수합니다. 

* 비밀소녀X뢴트게늄X권민 COVER곡 '우산'(https://youtu.be/T84CDxlwsXw)의 뮤직비디오 내용을 참고하여 재구성한 글입니다. 비밀소녀와 해루석이 등장합니다.

또한 비밀소녀와 해루석이 이름이 아닌 다른 지칭대명사로 나오니 이 점 유의 바랍니다. 

*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해당 글은 날조이며, 허구이고, 가상의 설정입니다..


 

여름방학이 다가오는 시기가 왔음에도 소녀는 그 애와 한 번도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소녀와 그 애와의 거리는 삼 분단 둘째 줄과 오 분단 맨 뒷자리 사이만큼 애매하게 멀었다. 그 애의 옆에는 항상 둘이나 셋 정도의 친구들이 있었고, 그 애는 늘 어딘가 불려 다녔으니까. 교실 안의 모두와 친해질 순 없지. 일 년 정도 입어 슬슬 옷깃이 닳기 시작하는 교복을 가진 학생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소녀는 그 애가 나의 운명이 아닐까? 하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이를테면 이른 장맛비가 쏟아지기 시작한 날, 떨어지는 빗방울을 하염없이 쳐다보던 그때가 그랬다. 하교 때까지도 비는 그칠 기세가 보이지 않았고, 부모님의 퇴근까진 너무 오래 남았었다. 흠뻑 젖을 것을 각오하고 뛰어가기 위해 가방을 가져오려던 순간 누군가가 소녀의 어깨를 두드렸었지. 소녀는 자신이 즐겨 읽던 순정만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애는 정말 만화 속 주인공처럼, 비효율적으로 행동했다. 본인의 우산을 소녀에게 건네고는 굳이 맨몸으로 빗속을 헤치며 뛰쳐나갔다는 뜻이다.

 

“같이 쓰고 가면 되는데…!”

 

소녀의 외침이 가볍게 파동을 이루며 튀었다. 촘촘한 빗줄기를 뚫지 못할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그 애의 우산을 든 채, 소녀는 잠시 빗속에 서 있었다. 그 애가 잡고 있던 우산 손잡이는 조금 따뜻했기에, 소녀는 이 순간이 꽤 낭만적이라고 느꼈다. 철없는 소녀의 순정이란 그런 것이다.

 

그 후론 가슴 뛰는 일뿐이었다. 가장 아끼는 펜으로 꾹꾹 눌러쓴 쪽지를 그 애의 책상 위에 얹어놓고 가는 순간이나, 그날 이후 항상 우산을 챙겼음에도 굳이 교문 앞을 서성이던 순간들. 그 애는 매번 적재적소에 등장해 소녀의 환상을 충족시켜주곤 했다.

 

‘우산 고마웠어’

 

한참을 고민한 것치곤 간단하기 짝이 없는 여섯 글자를 그 애는 오래도 읽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그날부터 그 애는 하굣길을 함께하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주문을 읊는 데 성공한 마법사처럼, 소녀는 작은 희열을 느꼈다. 그 애의 옆에 섰던 순간을 평생 잊을 수 없으리라. 둘은 굳이 하나의 우산을 나눠쓴 채 나란히 걸었다. 1인용 우산은 너무 좁았고, 소녀는 그것이 기꺼웠다. 소녀를 향해 기울어지는 우산이, 길고 검은 머리칼이 눈가를 가리는 그 애의 옆모습과 어쩔 수 없이 부딪히는 팔의 온기와 젖어들기 시작하는 그 애의 오른쪽 어깨가 좋았다. 살던 집과 정 반대 방향인 그 애의 집으로 굳이 멀리 돌아가며 소녀는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그 애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 애는 춤추는 걸 좋아하고, 농구도 잘하고, 생각했던 것보다 장난기가 많았고, 웃을 때 목소리가 근사했었고….

 

보송보송한 기억들은 친구들에게 호들갑 떨기도 민망할 만큼 소소했다. 그리고 그냥,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날 소녀는 이불 속에서 꽤 오랫동안 뒤척였었다. 잠들기 전에 항상 읽던 만화책은 며칠째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은 채였다.

 

웬일로 그 애가 결석했던 그날도 비가 많이 내렸다. 오늘은 어떤 대화를 나눌까, 이번에야말로 그네 의자가 있다는 파르페 집에 가보자고 해야지! 소녀가 그렇게 결심하고 짐짓 비장하게 등교했던 날이었다. 점심시간이 지나도 비어 있는 빈자리에 소녀는 조금 맥이 빠졌으나, 금세 그 애에 대한 걱정으로 머릿속을 채웠다. 파르페 집은 내일도 모레도 열 테니까. 소녀는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키 패드를 꾹꾹 눌러 문자를 보냈다. 성공적으로 문자가 전송되었다는 안내 메시지가 사라진 후, 소녀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쳐다봤다. 오늘따라 하루가 유난히 길고 지루하다고 생각하며. 아직 꺼지지 않은 휴대전화 안, 배경화면에 떠 있는 그 애만이 빗방울을 바라보는 소녀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문자의 답은 꽤 늦었다. 소녀가 그 애를 기다리다 못해 직접 집에 찾아가 볼까 망설이던 순간이었으니까. 정갈하게 쓰인 글자의 나열을 보는 순간 소녀의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렇게 길지 않은 문자의 마지막 글자만이 뇌리에 깊게 박혀 빙글빙글 돌았다.

 

‘안녕’, 안녕이었다.

 

소녀는 그 순간, 달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니까…만화 속 주인공처럼, 바보 같을 만큼 비효율적으로, 빗속으로 뛰쳐나가야만 했다. 소녀는 달렸다. 비는 지긋지긋할 만큼 축축하고 차가웠다.

 

 

그 애는 춤추는 걸 좋아했고(그 애의 꿈은 뭐였을까?), 농구도 잘했고(이사 간 곳은 어딜까?), 생각했던 것보다 장난기가 많았었고(나한테 얘기해 줄 순 없었던 걸까?), 웃을 때….

 

 

나는 그 애가 내일도, 모레도 있을 줄 알았어. 어떤 수식어를 붙여도 유치하고 찬란하기만 한 청춘을 오랫동안 나눌 수 있을 줄 알았어. 우리의 만남을 운명이라고 생각했었다고, 먼 훗날에 그 애에게 털어놓고는 둘이 같이 쑥스럽게 웃는 순간이 올 거라고 생각했었어. 그 애와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소녀는 그 애에 대한 것을 전부 알 순 없었다. 기억이 빗물에 씻겨나간다. 텅 빈 마음에 서서히 물이 차올랐다.

 

 

 

해당 만화는 개인 사정으로 연재 중단됩니다. 그동안 사랑해 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그 애, 해루석은 떠났다. 책을 덮어야 할 시간이 왔다. 비밀소녀 혼자만이 마지막 페이지를 붙들고 속절없이 서 있었다. 물방울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내리고, 또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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