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끝나고 할 말이 있어.
비밀소녀는 책상에 놓인 쪽지를 쳐다봤다. 혹시나 해서 자기 자리가 맞는지 확인도 두 번 했다. 핑크색 체크무늬의 천 필통과 하트 큐빅이 달린 샤프. 비밀소녀의 책상이 분명했다. 쪽지 속 글씨는 노트 필기를 빌렸을 때 슬쩍 봐뒀던 그 애의 글씨체가 맞았다. 소녀는 자기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가려진 틈새로 흐흣, 하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분명했다. 기다리던 순간이 드디어 왔다. 그녀는 오늘, 해루석에게 고백을 받을 것이다.
사실 대충 눈치채고 있었다. 해루석과 비밀소녀는 자주 웃으며 대화를 나눴고 종종 하교를 함께했다. 같은 유머코드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대화 주제, 몇 번이고 마주치던 시선과 은근히 주고받은 장난들. 바보가 아니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해루석도 바보가 아니었나 보다. 비밀소녀는 두 손으로 뺨을 감쌌다. 평소보다 촉촉한 것도 같았다. 며칠 전부터 슬쩍 엄마 옆에 붙어 팩을 해 둔 보람이 있네, 소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장마철이라 교실에 습기가 차 피부에도 물기가 느껴진다는 사실을 아예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어쨌든, 비밀소녀는 한껏 들떴다. 지금이라도 당장 수업을 끝마치고 그에게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아니지, 너무 기다렸다는 티를 내면 안 돼. 도도하게, 아니면 요조숙녀처럼? 소녀는 블로그에서 읽었던 인기 블로거들의 수많은 팁을 떠올렸다. 표정을 관리하려 애쓰며, 쪽지를 썼을 그 애의 자리로 슬쩍 눈을 돌렸다. 해루석은 자리에 엎드려 있는 채였다. 어깨와 단단히 얽힌 팔뚝을 타고 흘러내리는 그 애의 긴 머리카락을 바라보는데 자꾸 웃음이 나왔다.
“야, 음악이 너 불러.”
빗자루를 든 친구가 소녀를 불렀다. 비밀소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청소를 하느라 왁자지껄해진 교실 안에 소녀 한 명만 구름처럼 동동 떠 있었다. 약간 머쓱해진 소녀는 친구에게 감사인사를 건네고는 교무실로 향했다. 음악 선생님 자리에는 비밀소녀 말고 두어 명의 아이들이 더 모여 있었다. 소녀와 같은 합창부 동아리 부원들이었다. 소녀는 아이들과 가볍게 눈인사를 나누었다.
“오늘 단체 연습 있으니까, 너희들이 책임지고 애들한테 공지해. 절대 빠지면 안 된다고. 알았지?”
네에, 싱겁게 대답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비밀소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쪽지 때문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합창부는 곧 있을 합창경연 대회 준비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고, 그녀는 소프라노 파트장이었다. 같은 파트 아이들을 모으고, 관리하고, 연습을 진행하는 게 그녀의 역할이다. 이걸 깜빡하다니! 어떡하지? 그녀는 바람처럼 교무실을 빠져나왔다. 아우, 하필 오늘이라니! 하나둘씩 가방을 멘 채 복도로 흩어지는 아이들 사이를 소녀는 부지런히 달렸다. 드르륵! 교실 문을 힘차게 열고 들어섰다. 다행히도 루석은 아직 교실에 있었다. 이제 막 하교하려던 참이었는지 가방을 챙기고 있던 채였다. 평소보다 루석의 가방이 좀 묵직해 보인다고 생각하며, 소녀는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루석이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소녀는 그에게 우다다 말을 쏟아부었다.
“진짜 미안한데, 5시에 만나도 괜찮을까? 학교 앞 공원에서 보자!!”
비밀소녀는 대답도 듣지 못한 채 뒷문으로 뛰쳐나갔다. 아이들이 하교해버리기 전에 얼른 선생님의 공지를 전달해야만 했다. 연습을 빠질 수는 없었으니까. 기다려 줘. 끝나면 바로 뛰어갈게!
그런데, 그런데…. 비밀소녀는 울상이 된 채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놈의 연습이 도저히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하교하는 애들 몇 명을 가까스로 잡아 음악실에 데려다 놨더니, 심통이 난 건지 집중력이 완전히 바닥난 건지 음이 제멋대로 튀어나간다.
“얘들이 진짜 왜 이러지? 정신 차려! 오늘 될 때까지 할거야.”
온화했던 음악 선생님의 말투가 싸늘해졌다. 에에…. 아이들은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말끝을 흐렸다. 사실 소녀도 온 힘을 다해 연습에 매진했다고 하긴 어려웠다. 머릿속에 온통 그 애의 쪽지가 동동 떠다녀서 들어가는 부분도 몇 번 놓쳤다. 아직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 소녀의 마음은 악보 속 음표처럼 오르내리기만을 반복했다.
음악실 시계를 보기 위해 목을 쭉 빼고 쳐다봐도 잘 보이지 않았다. 실전처럼 하자는 선생님의 주장에 따라 다같이 칠판 앞에서 연습 중이었고, 시계가 걸려 있는 위치는 소녀가 서 있는 곳에서 너무 멀었다. 살벌한 분위기에 가방에 넣어 둔 휴대전화를 꺼낼 겨를도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지금이 적어도 다섯 시는 훨씬 넘긴 시간일 거라는 점이었다. 어떡하지? 소녀는 강렬한 책임감으로 지금 당장 뛰쳐나가고 싶다는 충동을 억눌렀다. 이왕 파트장까지 맡은 김에 끝까지 잘 해내고 싶었다. 여러 높낮이의 목소리가 합쳐지는 앙상블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루석에게도 들려주고 싶었다. 악보를 따라 흐르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그 애는 어떤 반응을 보여줄까? 비밀소녀는 목을 가다듬었다. 그래, 일단은 여기에 집중하자.
하루 종일 흐릿했던 창문 속 하늘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연습이 겨우 끝났다. 비밀소녀는 재빨리 휴대전화부터 꺼내들었다. 시간은 오후 여섯 시 삼십 분. 문자 한 통이 와 있었다. 소녀는 버튼을 꾹 눌렀다. 배경화면이 해루석의 사진에서 해루석이 보낸 문자 내용으로 휙 바뀌었다.
[가족 약속이 있는 걸 깜빡했어. 5시보다 더 늦게 만날 수 있을까?]
다행이다. 소녀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문자 끄트머리에 적혀있는 시간이 오후 네시 오십 분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빨리 답장을 보내야 한다. 소녀는 정신없이 자판을 두드렸다.
[응! 일곱시까지 갈게!]
문자가 무사히 전송되었다는 걸 확인하고 가방을 챙기려는 찰나, 선생님이 박수를 짝짝 치며 아이들의 주의를 끌었다. 아이들이 하던 것을 멈추고 선생님을 쳐다봤다.
“우리 합창부! 오늘 너무 고생 많았어. 선생님이 특별히 쏜다! 각 파트장들, 가서 햄버거 좀 가져와. 교무실에 있을 거야.”
와. 아이들은 함성 반, 차라리 집에 빨리 보내달라는 투덜거림 반으로 화답했다. 물론 비밀소녀는, 후자에 속했다. 지금 햄버거를 먹을 때가 아닌데……. 소녀는 울상이 된 채 선생님에게 쭈뼛쭈뼛 다가갔다. 자신의 통 큰 결정에 비해 시들한 아이들의 반응에 살짝 기분이 상한 선생님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비밀소녀를 쳐다봤다.
“왜?”
“그, 저기…. 정말 죄송한데요, 햄버거 안 먹고 바로 가봐도 되나요….”
“음…. 사실 먹으면서 간단한 공지 하나 하려고 했는데…. 얘들아, 다들 많이 바쁘니? 잠깐도 못 있어?”
선생님은 비밀소녀에게서 시선을 뗀 채 아이들을 향해 물었다. 부드럽게 묻고 있지만 말투가 예사롭지 않았다. 아뇨…. 잠깐이면 뭐…. 아이들의 대답을 들으며 소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타이밍의 신이 있다면 멱살이라도 쥐어잡고 싶었다.
“…얼른 가져올게요….”
소녀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너무 초조해지면 손끝까지 간질거리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 알았다. 소녀는 비척비척 교무실로 향했다. 복도에 진동하는 불고기버거 냄새가 코를 찔렀다.
[PM 08:10]
탁, 소리 나게 휴대전화의 폴더를 닫은 비밀소녀는 이제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그 ‘간단한 공지’는 언짢아진 선생님의 잔소리가 섞이기 시작하면서 지지부진하게 늘어졌다.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았던 공지사항은 소녀가 꾸역꾸역 햄버거를 입안에 다 밀어 넣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들을 수 있었다. 딴짓하지 말고 들으라는 선생님 때문에 중간에 문자를 보내지도 못했다. 뒤늦게 확인한 휴대전화에는 어떠한 전화도, 문자도 와 있지 않았다. 연락 없는 상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비밀소녀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실망했겠지. 한 시간이면 정말 오래 기다린 걸텐데. 가버렸을 거야.
소녀는 가방을 제대로 메지도 못한 채 달렸다. 소녀의 등 뒤로 가로등과 문을 닫은 분식집, 문방구가 휙휙 지나갔다. 이렇게 하루가 끝나버리면, 내일이 되어 버리면, 해루석의 용기가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쪽지에 꾹꾹 새겨 넣었던 그의 결심이 소녀에게 닿지도 못한 채 지워져버리는 건, 그건 정말 싫었다. 완전히 어두워져 컴컴해진 시야에 드디어 공원 표지판이 보였다. 소녀는 공원 안으로 뛰어들었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고, 목구멍이 타는 것처럼 아팠다. 엉망으로 흩어진 호흡을 진정시키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소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고는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하.
루석이었다. 어깨선에 닿는 검고 윤기나는 머리카락. 항상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사각의 반무테안경. 목 끝 단추 하나만을 푼 교복. 가로등 아래 벤치에 해루석이 앉아 있었다. 주변이 어둠에 잠겨 있었으므로, 가로등 아래 앉은 채 고개를 숙인 해루석의 모습이 더 또렷하게 보였다. 벤치 손잡이에 걸려 있는 노란 우산. 둘이서 함께 쓰고 하교하곤 했던 그 우산까지, 놓치지 않고 다 보였다. 비밀소녀는 어둠 속에 서서 숨을 골랐다. 지금 자신의 표정이 어떨지 문득, 신경 쓰였다. 미안함과 안도감과 설렘이 뒤섞여 엉망진창이겠지.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나를 기다릴 정도면, 이 애는 정말 나를……. 너무 오래 뛰었는지, 심장이 쿵쿵 뛰었다. 비밀소녀는 뛰어오느라 흐트러져 있을 교복 깃을 정돈했다. 땀범벅이 된 얼굴도 닦고, 삼지창처럼 갈라져 있을 앞머리도 손가락으로 슥슥 빗었다. 루석의 눈에 오늘의 소녀가 제일 단정하게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소녀는 천천히 루석에게 다가갔다.
“내가 너무 늦었지?”
비밀소녀는 해루석의 옆자리에 살며시 앉았다. 얼굴을 보고 얘기를 듣기엔 아무래도 좀, 간지러울 것 같아서였다. 루석은 약간 놀란 것처럼 보였다. 소녀는 그가 자신의 목소리에 담긴 떨림을 눈치채지 못하기를 마음속으로 바랬다.
“…전혀.”
루석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배려 섞인 대답과 함께 소녀가 편하게 앉을 수 있게 옆으로 살짝 비켜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소녀는 나올 뻔한 웃음을 꾹 참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루석은 꽤 오랫동안 말을 골랐다. 고민하는 눈치였다. 긴 침묵이 이어지자, 소녀는 슬슬 초조해졌다. 알겠어. 내가 널 먼저 기다리게 했으니까. 비밀소녀는 입을 열었다.
“할 말 있다고 하지 않았어?”
루석은 그 말을 듣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응, 그게…. 문자로 하려다가, 그래도 얼굴 보고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응.”
“너한테는 별일 아닐지도 모르지만 꼭 따로 말하고 가고 싶었어.”
그렇지. 이 정도면 괜찮은 시작이다. 소녀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맘졸이고 애태우며 초조해하던 하루의 끝, 오랫동안 엇갈려가며 겨우 만난 이 장소에서 루석이 꺼낼 다음 말을. 소녀는 조용히 기다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루석의 시선이 느껴졌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나 내일 이사 가.”
“……이사?”
……순간 귀를 의심했다. 이곳까지 뛰어오는 동안 상상 속 해루석은 정말 다양한 종류의 말들을 소녀에게 건네왔었다. 소녀는 그 말에 대비한 대답들을 하나하나 생각해뒀다. 그 수 십 가지의 선택지 중, …이 선택지는 없었다. 시험 범위에서 한참 벗어난 시험지를 받아든 비밀소녀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 아니…왜?”
“아빠 일 때문에. 원래 한 곳에 오래 못 있어.”
“멀리 가는 거야? …전학도 가는 거고?”
“응.”
넋이 나간 채 횡설수설 던지는 소녀의 질문에 해루석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오랫동안 이 순간을 준비해 온 사람처럼, 대답에 빈틈이 없었다. 소녀는 혼란스러웠다. 내가, 내가 생각했던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너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는, 이게 아니었는데.
“그래도 연락은…계속 할 거지? 할 수 있는 거지?”
아, 아까 노래하느라 가진 숨을 모두 써 버렸나 보다. 비밀소녀는 자꾸만 숨이 막혔다. 나는 너에게 내 노래하는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 하나로 오늘 하루를 보냈는데.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겨우겨우 던진 소녀의 질문에 루석은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오랜 망설임이 사실 그 어떤 대답보다도 명확했지만, 소녀는 루석의 목소리를 통해 확답을 들어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망설이던 루석이, 고개를 푹 숙였다.
“글쎄. 모르겠어.”
“…그렇구나.”
소녀는 루석의 옆자리에 앉은 채, 정면을 응시했다. 어둠에 휩싸인 공원, 아무도 걷지 않는 보도블록, 그 누구도 타지 않은 텅 빈 자전거 몇 대가 보였다. 비밀소녀는 숨을 조용히, 그리고 길게 내쉬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모든 감정이 몸에서 빠져나갔다. 기대도, 설렘도, 그 어떤 감정도 모조리. 머리가 아릴 듯한 고요 속에서 소녀에게 제일 먼저 돌아온 감정은…. 슬픔이었다. 귀와 코가 멍멍하게 막혀오더니, 결국 눈에서 주륵, 하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소녀는 손등으로 거칠게 눈가를 비볐다. 울었다는 걸 티 내고 싶지 않았다. 하루 종일 설레하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비밀소녀는 다음 날부터 해루석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슬펐다. 그리고 그걸 슬퍼하는 게 분했다. 저 애는 왜 저렇게 덤덤한 거야? 헤어짐을 반복하면, 익숙해지면, 슬픈 게 슬프지 않게 되는 거야? 그렇다면 그건 너무 잔인했다. 소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갑작스러운 첫 이별의 순간이 낯설기만 했다. 이별에 능숙해보이는 해루석 옆에서, 자신만 허둥대는 것 같아 서운하고 창피했다. 처음 공원에서 만났을 때와 같은, 하지만 몹시 다른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툭, 투둑. 하루 종일 하늘이 흐리더니만 이제서야 비가 오기 시작한다. 한두 방울로 시작된 물방울이 점차 굵어졌다. 옆자리에서 해루석이 일어났다. 비밀소녀의 옆자리가, 텅 비었다. 이윽고 작게 팡.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소녀에게로 무언가가 내밀어졌다. 노란 우산이었다. 소녀는 이따금 볼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를 손등으로 훑기만 할 뿐, 고집스레 앞만 쳐다봤다.
“데려다줄게.”
해루석의 목소리가 소녀의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일어서서 소녀를 향해 우산을 기울여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너와 나는, 우리는 늘 같은 우산을 쓰고 집에 가곤 했다. 그때마다 너는 항상 나를 향해 우산을 기울여주곤 했다. 자신의 한쪽 어깨가 젖어들어가는 걸 뻔히 알면서도. 소녀는 이런 해루석의 배려가 정말, …….
“싫어.”
비밀소녀는 싫다고 대답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었으니까. 어떻게 해서든 어깃장을 놓고 싶었으니까. 싫다고 대답하면 혹시 해루석이 떠나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솔직히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실낱같은 기대조차도 루석은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소녀의 손에 우산을 쥐여줬다. 돌려주지도 못할 우산을 받고야 말았다. 손에 들린 손잡이가 따뜻해서 더 눈물이 솟구쳤지만, 소녀는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오래 있지는 말고. 잘 들어가.”
빗줄기가 점점 거세진다. 이 비를 우산 없이 맞는다면, 순식간에 흠뻑 젖어버릴 것이다. 이런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걸어가는 사람은…정말 바보임이 틀림없다. 비밀소녀는 해루석에게 우산을 건네받은 그 자세 그대로. 하염없이 자리에 앉아있었다. 우산을 두드리는 빗줄기가 불협화음을 이루며 마구잡이로 튀어오른다. 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수많은 물방울들이 샛노란 우산에 맺혔다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우산 아래에서 그 애와 나누었던 적지만 많은 이야기들을, 그 추억들을 이제 소녀 혼자 흘려보내고 있었다.
정말, 가는구나. 너에게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끝끝내 듣지 못하고, 너는 가버렸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너와 우산을 나눠 쓰지 말 걸. 너랑 친해지지 말 걸.
소녀는 뒤늦은 미련에 흠뻑 젖은 채 오래오래 앉아있었다. 처음 그 애와 만나기로 약속했던 시간은 이미 훌쩍 지나버린 후였다. 마지막으로 너에게 했던 말이, 이제서야 마음에 걸렸다. …이렇게 헤어질 줄 알았으면 괜한 고집 부리지 말 걸. 앞으로 내가 없을 너의 미래를 향해 손이라도 흔들어줄 걸. 가로등 아래, 이따금 흔들리는 노란 우산만이 외딴 섬처럼 떠 있었다. 도저히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빗줄기 사이로 소녀는 닿지 않을 인사를 건넸다. 아까 미처 하지 못했던, 온 몸에 비를 맞으며 떠나간 너에게 들려줬어야 했던 그 한마디. 뒤늦게 마음 속에 한가득 고이기 시작한 그 말을.
안녕, 잘 가.
함께 고생해주신 강두님 정말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해루석 시점 : https://posty.pe/312b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