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의 글은 공지사항(https://mintlatteis.tistory.com/notice/1)을 언제나 준수합니다.
- 오뱅내는 판타지게임 합방입니다! -왁타버스 판타지 합작- 제출용 글이었습니다~! 즐겁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풍신님의 영상 '마법인들의 밤(https://youtu.be/xsreZWFL68o)'에서 제목을 차용하였습니다.
“이궁. 또 불씨를 날려먹었구먼.”
노인이 새된 소리를 냈다. 간당간당하게 온기를 유지하던 불씨가 픽, 힘없이 꺼졌다. 소녀는 자신을 향한 것이 분명한 노인의 타박을 애써 외면했다. 긴 수염의 노인, 풍신도 그 이상의 말을 얹지 않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풀과 나무가 빽빽이 얽혀 있는 숲은 고즈넉하기만 했다.
“…해가 뜨면 성에 도착할 수 있겠지요.”
소녀는 중얼거리며 옷깃을 동여맸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괜히 한기가 들었다. 한갈래로 높게 올려묶은 소녀의 머리카락이 파르르 떨렸다.
“애초에 할아버지가 갑자기 약초를 따오자고 말하지만 않았어두, 이렇게 어두워질 때까지 길을 헤맬 일은 없었다구요.”
“이잉…. 어쩌라구용.”
풍신은 자기를 향해 따갑게 쏟아지기 시작하는 소녀의 타박을 한 귀로 흘렸다. 확실히 무작정 함께 숲으로 가자고 제안했던 건 자신이 맞았지만, 단번에 미안하다 사과하기엔 어쩐지 ‘쫀심이 상했다’. 풍신은 최근 동네 아이들이 썼었다며 소녀가 가르쳐 준 표현을 머릿속에 떠올렸다가 털어냈다.
풍신이 이 소녀와 함께한 것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이제는 잊혀져 사람들의 발길도 끊긴 낡은 성에 주홍빛 머리의 소녀가 숨어들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게 불과 몇 개월 전이었다. 오크나무로 된 책상 밑에서 동그란 뒤통수를 발견했을 땐 말 그대로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이 망할 눔의 짜식이!”
수염이 휘날리게 쫓아다녔으나 소녀는 잽쌌다. 잠깐의 소동 후, 풍신은 소녀를 손쉽게 허공에 매달아두는 데 성공했다. 소녀의 품 안에 숨겨둔 물약들이 우르르 바닥으로 떨어졌다. 순박해보이는 외모와 달리 도둑질에 꽤나 일가견이 있는 모양이었다.
‘짧은 시간에 많이도 담았군.’
발버둥을 치며 빠져나가려고 애쓰는 소녀를 보며 풍신은 깨달았다. 근처 마을에서 온 것이 분명한, 이 너절한 차림새의 소녀는 무려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바람 마법사’의 재물을 훔치곤 이렇게까지 도망 다녔다는 것을! 풍신은 소녀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또랑또랑한 눈빛이 총명해 보이는 게 썩 마음에 들었다. 풍신은 본인이 꽤 호기심이 많고,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오랜 세월을 홀로 살아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잊히는 것들이 참 많았다.
“…자네는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비밀소녀.”
…그렇게 비밀소녀는 풍신의 성에 하루가 멀다 하고 드나들게 되었다.
풍신은 이 소녀에게, 우선 다른 사람의 물건에 손대지 않는 법부터 가르쳐야 했다. 자신의 심부름을 해 주면 그만큼의 대가를 주겠다고 몇 번이나 타이른 후에야 비밀소녀는 풍신의 수정구슬을 탐내는 것을 그만두었다. 비밀소녀는 자신에게 새로 주어진 ‘심부름꾼’이라는 역할에 빠르게 적응했다. 가끔 마을의 가십거리를 들려달라고 하거나, 당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는 주문을 노래처럼 읊어보라고 하거나, 끔찍한 맛의 물약을 마셔보라고 하긴 했지만, 어쨌든 자신에게 손해가 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때때로 풍신이 건네주는 작은 물약들이나 간단한 주문이 적힌 양피지들은 비밀소녀의 며칠치 식량이 되었다. 다른 사람의 주머니를 터는 것보다 귀찮고 번거로웠다. 하지만 솔직히, 조금 재미있었다. 비밀소녀는 마을에서 구닥다리 소문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은둔 마법사’가 분명한 이 수상한 할아버지가 싫지 않았다.
그랬기에 비밀소녀는 평소처럼 성을 찾아온 자신에게 다짜고짜 물약 제조에 필요한 약초를 캐러 나가자고 말하는 마법사를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따라나섰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팔자에도 없는 야영이었다..느지막한 오후나 돼서야 출발하는 것부터 어째 불안하다 싶더니, 풍신은 '여기였던 것 같았는데….', '아니 분명 여기 있을텐데….'를 주문처럼 읊어대며 지팡이를 휘두르다 결국 그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고 말았다. 들어오는 길도 알 수 없는 깊은 숲 속이었다. 그리고 속절없이, 해가 져버렸다.
아직 밤은 길었다. 하루쯤 자신의 텅 빈 오두막에 돌아가지 않아도 상관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뜬금없는 숲속에서의 표류가 즐거운 것은 아니었다. 비밀소녀는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한숨을 애써 참았다. 비밀소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결국 불씨를 살리는 것에 성공한 풍신이 모닥불을 쬐며 툭, 내뱉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노래나 한 곡 하는 게 어때요.”
이 할아버지가 진짜. 원체 뜬금없는 부탁을 잘 하긴 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비밀소녀는 자기도 모르게 으잉? 하고 바보 같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여기서? …갑자기요?”
“아니, 그럼 지금 여기서 뭐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마법으로 어떻게든…못 하는 건가요?”
“지금 상황에서 쓸 만한 건 없지. 그리고 원래 숲에서 야영할 땐 모닥불 쬐면서 노래도 하고~악기도 연주하고, 그러는 거에요. 그게 다 낭만이야, 낭만.”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이 황당한 표정이 가득 담긴 비밀소녀의 얼굴을 비췄다.
“……제가 부르는 건가요?”
“그럼, 자네가 해야지. 나는 이제 나이가 들어서 힘들어요.”
오늘 낮에 외친 ‘바람 풍!’만 합쳐도 노래 두세 곡은 나올 것 같던데요…. 비밀소녀는 로브를 여매는 풍신을 향해 눈을 흘겼다. 풍신은 흠흠,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이 사람 좋은 마법사는 의외로 단호해서, 한번 마음을 굳히면 무슨 일이 있어도 무르는 법이 없었다. 두 사람의 대화가 끊긴 숲속은 풀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확실히, 적적하긴 했다.
에효, 작은 한숨을 내쉰 비밀소녀는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묘한 색의 구름이 달마저 덮어버린 밤하늘은 어두운 만큼 몽환적이었다.
‘노래라….’
사실 비밀소녀도 최근에 나오는 유행가들은 잘 알지 못했다. 비밀소녀는 조금 더 오래전, 정확히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었다. 적당히 고루하고 전통적이라 할아버지가 듣기에도 무리가 없을 곡이…그렇지, 어디서 들었었는지 가물거리긴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확실히 떠오르는 곡이 한 곡, 있긴 했다. 어디보자, 그 노래는 이렇게 시작했었지. 비밀소녀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
풍신은 찬란했던 한때를 노래하는 비밀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흥얼거리는 노래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낡은 동요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제는 몇 번의 크고 작은 전쟁 끝에 그 기원이 잊힌 정령들의 노래였다. 간단하고 단순한 멜로디가 돋보이는 노래였지만, 그 뿌리에는 역사가 있었고 문명이 있었으며 수많은 피와 희생이 있었다.
이 소녀는 그것을 알고 있을까? 지금 이 장소에서 그 노래를 떠올려 부른다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게 마법의 가호가 깃들어 있다는 증거라는 것을. 모두가 기억하지도, 찾아오지도 못했던 마법사의 성에 들어선 순간, 그녀의 운명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다는 것을. 산짐승들과 수풀 사이에 숨어든 살아남은 정령들이 숨죽여 그녀의 노래를 듣는다. 숲이 그녀를 향해 오롯이 귀를 기울인다. 대대로 차기 마법사가 될 인재들을 시험하며 자격이 되지 않는 자는 영영 같은 곳을 맴돌게 하는 이 숲의 이름은 우습게도, ‘비밀의 숲’이다. 고대의 풍습은 철 지난 농담 같은 면이 있었지. 그 점만은 몇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았다. 풍신은 피식 웃으며 자신의 약초 주머니를 내려다봤다. 애초에 무언가 담을 생각도 없었던 주머니는 텅 비어 있었다.
한차례의 바람이 비밀소녀의 주위를 부드럽게 감쌌다가 사라진다. 정령들이 쭈뼛거리며 그녀에게 다가온다. 이내 공기를 잔뜩 머금고 둥글게 부풀어 오르더니, 그녀의 정수리 위를 빙글빙글 맴돌기 시작한다. 두 눈을 꼭 감은 채 노래에 열중한 비밀소녀가 채 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풍신만이 이 모든 과정을 오롯이 보고, 듣고, 느꼈다. 초목을 닮은 그의 눈빛이 순간 푸르게 타올랐다.
사실 풍신은, 600년 동안 거친 풍파를 지내오며 바람 그 자체가 되어버린 늙은 마법사는, 후손들이 이렇게 해맑게 노래하는 시대를 바라왔었다. 탐욕에 찌들어 목에 핏대를 올리던 어리석은 치들과 전쟁의 상흔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끝내 색이 바래지기만을 기다려왔다. 정령의 축복을 받으며 노래하는 비밀소녀와 지켜보는 풍신, 이제는 이름조차 남지 않은 노인의 스승과 청년 시절의 풍신이 그들의 모습에 희미하게 겹쳐오는 듯했다.
두 사람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덤불이 주춤거리더니 길을 비켰다. 풍요의 시대가 바스락거리며 서서히 막을 열기 시작한다. 지나간 것들을 날려 보내고,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끝났다.
‘내일부턴…자네를 제자라고 불러야겠구먼.’
풍신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다음 시대를 빛낼 새로운 마법사의 노래는 오래도록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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