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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이 오르기 전에

by 민토minto 2023. 2. 20.

비밀소녀는 숨을 골랐다. 가슴이 뻐근해질 때까지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들뜬 마음이 가라앉고 어깨 근육이 이완되는 것을 느꼈다. 감은 눈 틈새로 익숙한 명도의 빛과 먼지 섞인 텁텁한 공기가 스며든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낭독하는 안내 문구를 들으며 비밀소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가 무대에 오르기까지 남은 시간, 10분.

 

 

막이 오르기 전에

 

 

몇 번의 무대를 서긴 했지만, 등장을 기다리는 순간은 처음처럼 떨렸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비밀소녀는 이 순간을 꽤 좋아했다. 개인이 아닌 각본가와 본인의 해석이 첨가된 ‘타인’을 연기하기 직전의 순간. 악기의 현처럼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과 눈을 감았다 떴을 때 느껴지는 가벼운 현기증까지 좋았다. 또 다른 세계로 들어서는 순간이니까 어지러울 수밖에 없지. 비밀소녀는 항상 그렇게 생각해왔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지, 언제까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은 잠깐 밀어둬도 괜찮은, 그래도 되는 별세계. 그녀에게 있어 연극은 그런 존재였다.

 

비밀소녀는 입을 풀며 눈앞에 있는 거울을 응시했다. 조명이 달린 거울에 조그마한 여자가 비쳤다. 일부러 잔머리가 많이 삐져나오도록 동그랗게 말아 묶은 머리와 헐렁한 셔츠. 배역에 딱 들어맞는 스타일링이다. 비밀소녀는 거울 속 ‘그녀’를 쳐다보며 웃었다. 인상을 찡그렸다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잔잔한 푸른빛의 눈동자가 빠르게 깜빡이며 여러 가지 감정들을 표현해냈다. 컨디션이 괜찮으니 표정은 그만 가다듬어도 된다. 좁은 책상 위 어지럽게 널려 있는 화장도구들과 빈 물통, 물티슈 따위를 대충 밀어내던 비밀소녀의 손이 대본을 들어 올렸다. 플라스틱 용수철로 엮은 대본은 얼마나 많이 들여다봤는지 종이가 너덜너덜해질 지경이었다. 그녀는 아까부터 귓가를 윙윙 울려대던 목소리에 정신을 집중했다. 분장실은 가벽 바로 뒤에 있었기에, 조금만 귀를 기울여도 연극의 흐름을 대강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배우들의 대사가 또렷이 들렸다. 비밀소녀는 들려오는 목소리에 맞춰 대본을 든 채 대사를 복기했다.

무대로 가기 전까지, 이제 7분.

 

 

등 뒤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인기척이 느껴졌다. 비밀소녀는 돌아보지 않아도 그 인기척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대본에서 눈을 뗀 비밀소녀가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봤다. 거울 속, 시커먼 머리칼을 어깨선까지 늘어뜨린 남자가 보였다. 조명에 비쳐 안경이 번쩍거리는 거로도 모자라 고개까지 45도로 꺾인.

 

“아, 깜짝이야!”

 

비밀소녀는 그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숨죽여 외칠 수밖에 없었다. 독특하게 등장하는 데 이골이 난 남자, 그녀의 상대역인 해루석이다. 소녀의 반응이 만족스러웠는지 루석은 열 받게도 조용히 브이 포즈를 해 보였다.

 

“왜 맨날 그렇게 등장하는 거예요. 진짜 소리라도 지르면 어떡하려고.”

 

소녀의 잔소리를 뒤로하고 루석은 조용히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긴장되지도 않는지 시종일관 여유로운 모습이다. 비밀소녀보다 조금 더 무대에 오른 경험이 많은 선배긴 했으니까. 소녀는 루석의 몸에 밴 경험 섞인 차분함이 내심 얄미우면서도 부러웠다.

 

“…오늘 관객 얼마나 돼요?”

“평소랑 비슷한 듯?”

“괜찮네, 그 정도면.”

 

다음 장면에서 둘은 동시에 등장한다. 남은 대기시간 동안 두 사람은 간단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분장실에서 떠드는 소리가 새어나가면 안 된다. 연극을 보러 온 관객들이 소음을 예민하게 잡아낼 수도 있기에, 최대한 소리를 낮춰서 대화해야 했다. 두 사람은 비밀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소곤거렸다.

 

“거기, 눈 밑에 번졌다.”

“헉, 진짜요?”

“아뇨.”

 

아니, 초딩이세요? 비밀소녀는 몸을 홱 돌려 남자를 쳐다봤다. 루석은 금세 고개를 돌린 채 딴청을 피웠다. 소녀는 한참 루석의 옆모습을 째려봤다. 왼쪽 구석에는 무대 의상이 걸려 있는 행거 뿐인데. 재밌는 것도 없는데. 꽤 긴 시간 동안 그쪽만을 꿋꿋이 쳐다보고 있는 게 어이없고 웃겼다. 소녀는 다시 얼굴을 돌렸다. 혹시나 진짜로 분장에 이상이 있으면 안 되니까. 거울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자니 등 뒤에서 똑같이 거울을 쳐다보고 있는 루석의 모습이 보였다. 거울 속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아, 또 이러네. 비밀소녀는 기시감을 느꼈다. 그와 그녀는 이번 연극의 파트너였다. 상대역이라 호흡을 맞출 일이 많아, 따로 연습실을 잡아 연습할 때도 많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연기하는 순간이 아니면 좀처럼 서로의 눈을 마주 보지 않았다. 한 몸처럼 척척 호흡을 맞춰내다가도, 연습이 끝나면 각자의 일상을 보내기 위해 빠르게 멀어졌다. 캐스팅보드에 붙어 있는 둘의 사진처럼, 두 사람의 시선은 나란히 평행선을 달릴 뿐 마주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배역이 아닌 ‘해루석’과 ‘비밀소녀’ 두 사람이 눈을 마주치는 순간은 이렇게, 서로 거울을 보고 있는 순간뿐이었다.

 

 

“힘들어요?”

 

어느 날엔가, 그날의 마지막 연습을 끝내고 지쳐서 쓰러지듯 주저앉은 비밀소녀에게 그가 말을 걸어온 적이 있었다. 소녀가 기억하기로는, 그에게서 처음으로 들었던 사적인 질문이었다.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그는 그녀를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비밀소녀의 바로 옆에 쭈그리고 앉은 해루석은 이온 음료로 목을 축이며 그저 앞만을 응시했다. 연습실 한쪽 벽면을 차지한 커다란 전신 거울에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비밀소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힘든데, 재밌어요. 잘 하고 싶고요.”

“그래요.”

 

그게 그날 대화의 전부였다. 그들은 연습실을 정리하고 각자 흩어졌다. 그때 이후, 두 사람은 종종 이런 부류의 대화를 나눴다. 히터가 강하니 목이 잠기지 않게 조심하라든지, 이런 작품들이 연기할 때 도움이 됐다든지, 하는. 거울 앞에서만 이어지는 짧고 단조로운 이야기들. 앞에 있는 거울을 향해 나란히 서거나 앉은 채 대화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꽤 우습게 보였을 것이다. 그냥 마주 보고 이야기하면 되는데. 고개만 돌리면 서로의 눈을 보며 말할 수 있을 텐데. 소녀가 진작 알아챘을 정도이니 그도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다.

 

많이 나는 키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한쪽이 까치발을 들거나 무릎을 굽혀야만 눈을 마주 볼 수 있을 정도로 둘의 키 차이는 꽤 되는 편이었으니까.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 굳이 한쪽이 몸을 움직여야 하는 번거로운 조건을 지키지 않아도 됐으니까. 하지만 그건 핑계다. 이제는 다른 이유가 있음을 그도, 그녀도 알고 있다. 비밀소녀는 이런 애매한 거리감. 자로 잰다면…그래, 2cm 정도로 추정되는 이 심리적 거리감이 좋았다. 상대방의 의중을 끝까지 떠보지 못하는, 약간은 건조한 관계가 기꺼웠다. 두 사람이 배역에서 벗어나 서로를 향해 눈을 마주치는 순간, 날것의 원본을 봐버리고 말 테니까. 누군가의 시선에 의해 다듬어진 무대 위 배우가 아니라, 당장 오늘 저녁에 어떤 라면을 먹을지 고민하는 한 사람이 보이고 말 테니까. 소녀는 전후가 바뀌어 온전히 서로의 모습이 비치지 않는 순간이 좋았다. 마주 보고 있지만 마주 보고 있지 않은 두 사람. 이 정도면 충분하지. 그도 분명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비밀소녀는, 막연한 확신에 찬 채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거울 속 남자가 슬쩍 웃었던 것도 같다.

무대로 가기 전까지, 이제 2분.

 

 

“시간 다 됐다. 나오세요.”

 

해루석이 비밀소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속삭였다. 소녀도 일어났다. 두 사람은 작게 파이팅을 외쳤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해루석의 뒤를 따라 좁은 통로로 향했다. 또 다른 세상으로 향하는 입구를 그와 함께 걸어간다. 현실 한 조각을 떼어 붙여놓은 것 같지만 현실과는 확연히 다른, 몇 평짜리 좁은 세상으로 향하는 도입부를 향해 걸어간다. 관객들의 박수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온다. 심장이 쿵쿵 뛰어서, 얇은 벽 너머로 들릴까 봐 약간 겁날 정도였다. 조용히 걷던 해루석이 한 마디 툭, 내뱉는다.

 

“잘하시니까, 떨지 마세요.”

“네.”

 

소녀는 남자의 뒤통수를 향해 대답했다. 그녀는 곧 마주칠 몇십 명의 관객들과 첫 대사에 대해 생각했다. 모두의 시선을 오롯이 받아내면서도 본인의 감정을 숨기고 낯선 세계가 익숙한 척, 당연한 척 연기해야 하는 직업. 그런 일을 뻔뻔하게 해내고야 마는 베테랑 파트너. 그녀는 이런 모든 것이 좋았다. 비밀소녀는, 해루석과 함께 막에 올랐다. 어디선가 뿜어져 나오는 빛이 그녀의 눈가로 스며든다. 그건 꼭, 거울에 반사된 빛 같았다.

 

 


왁타버스  '한 주제로 글쓰기' 합작 제출용 글이었습니다~!

주제 : 마주보고 있는 거울

밑은 간단한 후기입니다~!(읽어주시면 킹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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