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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장

by 민토minto 2023. 3. 17.

잘 지내고 계시나요?

 

…이 편지를 읽으실 당신의 얼굴이 눈에 훤하네요. 조금 놀라실지도, 오히려 '그렇게 꾸준히 보냈었는데 이제서야 답장을?'하고 어이없어하실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요. 솔직히, 저 당신에게 조금 토라져 있었습니다. 당신이 이곳에 오지 않은 지 꽤 되었으니까요. 이렇게까지 오래 이곳에 오지 않았던 적이 처음이시잖아요. 당신이 일정 주기마다 보내주는 편지를 딱 한 번만 읽고 아무렇게나 팽개쳐두는 게 저 나름의 작은 반항이었어요. 당신이 나의, 이곳의 안부를 궁금해하다 못해 직접 찾아오기 전까지 절대 먼저 연락하지 않아야지. 그렇게 생각하면서요. 그런데요, 이번에 보내준 당신의 편지를 읽고 나는 펜을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조금씩 편지 쓰는 법을 익혀두는 게 좋겠다 싶어서요.

 

보내주신 편지 감사히 잘 받았습니다. 사실 그동안 계속 감사히 받아왔었어요. 저, 당부하셨던 모든 일을 매일매일 꾸준히 하고 있었답니다. 화분에 물도 때맞춰 잘 주고 있고, 책장의 먼지는 이 주에 한 번씩 털어내고 있어요. 주문서를 제대로 분류해놓는 것도, 당신이 늘 사용하던 잔에 녹이 눌어붙지 않게 꼼꼼히 닦아내는 것도 빼먹지 않고 하고 있지요. 이곳은 언제나 그랬듯이, 당신이 떠나기 전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지금 저는 책상에 앉아 편지를 쓰고 있어요. 당신의 손 한 뼘을 겨우 넘는 크기의 저로서는 이 책상도 하나의 대륙처럼 느껴집니다. 그도 그럴 게, 제가 머무르는 이곳이 저를 구성하는 세계의 전부니까요. 이를테면 저기 모여있는 양피지 다발은 저의 작은 '숲'이고, 걸레질을 하기 위해 물을 채워둔 양동이는 '호수', 그리고…당신이 매번 보내주는 저 책들. 그건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창문'이랍니다.

 

저걸 '사진첩'이라고 부른다 하셨죠?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며 편지에 처음 이것을 동봉하던 때가 엊그제 같네요.  '사진'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셨지만, 사실 정확히 뭔진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카메라'라는 아티팩트를 사용해서 순간을 저장해두는 마법의 부산물, 그 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맞나요?) 처음에는 한두 장 정도 슬쩍 끼워 보내던 '사진'을 어느 순간 책 한 권을 빼곡 채울 정도로 잔뜩 찍어보내기 시작하셨죠. 벌써 당신이 보내온 '사진첩'이 열 권을 훌쩍 넘겼다는 사실, 알고 계시나요?

 

얘야, 잊을 수가 없단다. 나의 검지가 굽혀지며 세상이 잠깐 멈추던 찰나를, 시간을 흘려보내기만 하던 내가 그 작은 화면 안에 다른 이의 시간을 담아내는 그 순간을, 나는 아마 평생이 지나도 잊지 못할 것 같구나.

 

처음 편지에 '사진'을 동봉하던 날, 당신이 적어 준 문구에요. 나는 글을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그 구절을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몇 백 년의 시간을 보내온 당신의 입에서 나온 '평생'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면서요. 제가 본 적 없는, '잊을 수 없는 순간'에 새겨진 사람들이 당신의 사진첩에 가득했습니다. 처음 보는 풍경 속에서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웃고 있었어요. 당신의 시선을 통해 보게 돼서 그런 걸까요? 그 사람들이 자주 만난 사람들처럼 퍽 다정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앨범을 덮을 때마다 괜히 심술이 났어요. 이곳을 뒤로한 채, 커다란 건물 옆 구석에 천막을 치고 생활하실 정도로 그들이 좋으신 건가 싶어 괜히 허공을 향해 주먹을 몇 번 내질러볼 정도로요. 

 

지금 사진첩은 당신의 책장 한 줄을 당당히 채우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오래되고 낡은 이곳에서 매끄러운 표지의 그들만이 생기를 띈 채 빛나고 있어요. 이 사진첩이 주변과 같은 색으로 물들 때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위대한 마법사이신 당신의 손으로 빚어낸 순간들이니까, 아마 아주 오랫동안 빛을 잃지 않겠지요.

 

언젠가 당신이 제게 말한 적 있지요. 사람의 시간은 유한한 주제에 너무 빨리 지나가버린다고. 몇 백 년, 아니 그 이상의 세월을 견뎌내야 하는 우리에게 그건 꽤 가혹한 일이라고. 그래서 당신과 나는 대화했었잖아요. 서로가 서로에게 있어줘서 다행이라고. 실타래처럼 길게 늘어진 시간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존재는 소중하다고요. 저는 그 말에 꽤 안심했던 것 같아요. 당신의 성이 생겨났을 때부터 저는 쭉 이곳에서 지내왔으니까요. 그래서 언제나 당신이 곁에 있을 거라고. 잠시 자리를 비우더라도 금세 다시 돌아와서 함께 변함없는 일상을 보낼 수 있을 거라고 자만하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우선 너에게 사과를 전해야겠구나, 얘야. 미안하다. 나는 이곳에 있으려 한다. 사랑하는 빛바랜 것들을 뒤로하고, 찬란하게 빛나는 이들의 짧은 순간들을 담아두려 한다. 조금 더 이 여정을 즐기고 싶구나. 언젠가 때가 된다면 반드시 너에게로 돌아가마.

 

저는 늘 편지가 도착하자마자 그 자리에서 뜯어서 읽고는 아무렇게나 던져두곤 했어요. 그런데 그날은 그럴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당신의 편지를 창틀에 돗자리처럼 깔아놓고는, 그 위에 앉아 창밖을 구경했어요. 들판에 펼쳐진 초목이 푸르게 흔들리다가 그늘에 가려 잠깐 어두워졌다가 다시 찾아온 햇빛을 받고 생기를 띄는 것을, 이내 노을빛에 물들고, 어둠에 완전히 묻히는 것을 놓치지 않고 모두 보았습니다. 한번 눈을 깜빡이면 지나갈 하루 동안 세상엔 수없이 많은 일들이 일어나더라고요. 좁은 틈새로 보이는 단순한 풍경도 이렇게 시시각각 변해가는데, 당신이 지내고 있는 그곳엔 과연 어떤 풍경이 펼쳐지고 있을까요? 

저는 잠깐 당신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마법 학교 학생들이 가르쳐 준 놀이는 뭐든지 해 봐야 직성이 풀리는 장난꾸러기 같은 당신.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을 좋아하는 당신.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활용하는 걸 즐거워하는 다재다능한 당신. 그런 당신에게 이곳은 아늑하고 평온한 보금자리였겠지만, 그만큼 벗어나고 싶었던 곳은 아니었을까요? 그런 결론에 다다랐을 때 저는, 그제야, 구석에 쌓아뒀던 당신의 편지와 사진첩들을 책장에 꽂아 넣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조금 빛바랜 것들이 좋아요. 다정한 당신이 말해줬잖아요. 빛을 잃는 것이 마냥 나쁜 일은 아니라고. 빛을 잃는다는 것은 세월의 흔적을 남기는 것. 계절이 바뀌면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자신의 색을 바꾸어 나가는 것. 풍화되는 기억의 빛깔에 따라 자신의 채도를 맞춰나가는 것. 누렇게 변색된 채 닳아빠진 책 속에는 만고의 지식이 담겨있고, 칠이 벗겨진 화분은 여전히 식물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지요. 저의 세계를 구성하는 것들은 당신과 함께 낡아왔기에, 저는 이 모든 것들을 가슴 깊이 아끼고 있어요. 그랬기에, 저는 근사하게 빛을 잃은 이곳을 뒤로 한 채 달려나간 당신을 이제야 응원하려 해요. 바람을 가둬둘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요. 나이가 많다고 해서 도전하지 말라는 법은 없고, 오래된 것들을 사랑한다고 해서 빛바랜 세상에 고여 있어야만 한다는 법 또한 없지요. 당신은 어디든지, 얼마든지 날아다닐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이제 괜찮습니다. 저는 당신을 좀 더 기다려보기로 했어요. 심통 부리는 대신요. 정말 당신이 보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 날에는, 당신이 보내 준 사진첩을 열어보기로 했어요. 빛과 색을 잃지 않은 채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기억의 조각들과 함께, 어딘가에서 그 순간을 오롯이 즐기고 있을 당신의 모습을 그려볼게요. 그래요. 저는 당신의 성을 지키는 파수꾼. 지나간 세월을 공감할 수 있는 당신의 영원한 아군. 당신의, 친구니까요.

 

 

그러니 당신에게, 오랜 세월 함께해 온 바람에게.  

 

모든 풍경을 즐기고, 모든 순간을 눈에 담아요. 

당신만큼이나 상냥하고 다정한 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세요.

그러다 언젠가, 아주 먼 훗날에. 조금 심심해지거나 외로워지는 그날에.

 

당신의 보금자리가 있음을 기억해 주세요. 당신이 한때 사랑했던, 여전히 사랑하고 있을 낡은 것들에 시선을 보내주세요. 저는 그날을 기다리며 언제까지나 우리의 세계에 머무르고 있겠습니다.

 

그때까지 부디 건강하세요. 

  

풍신님께,

당신의 오랜 벗 올림.

 

 

 

 


왁타버스 합작 [여섯개의 이야기]에 제출한 글이었습니다.

주제 : "나는 조금 빛바랜 것들이 좋았다."

아래는 짤막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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