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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뿌직 스페셜

선잠

by 민토minto 2025. 1. 30.

 

 

 

 

“오래 걸려요?”

 

 소녀는 그렇게 물었다. 시선은 맞추지 않은 채였다. 루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소녀는 볼펜을 쥔 채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루석을 바라보았다. 묶지 않아 길게 늘어진 검은 머리칼 사이로 언뜻 보이는 루석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이따금 책상에 볼펜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소녀는 그 소리가 꼭 둘 사이의 말줄임표를 찍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침표라기엔, 잦게 찍었으니까. 그렇기에 소녀도 입을 꾹 문 채 침묵을 지켰다.

 

 소파에 느슨하게 기대 있던 몸이 스르르 넘어갔다. 푹신한 감촉을 느끼며 소녀는 잠시 뒤척였다. 방 천장에 부유하는 먼지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민트색 카세트테이프가 들어 있는 오래된 라디오, 옆에 쌓인 CD들, 엷게 먼지가 쌓인 피아노, 잡동사니가 가득 들어있을 금속 사탕통. 긁힌 자국이 남아있는 나무 책상.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바라보는 방의 모습은 익숙한 듯 새롭다. 소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낡고 쿰쿰한 향이 나는 흰 종이와 나뭇잎을 말려 코팅한 책갈피를 지나, 루석의 옆모습에 기어이 시선이 와 닿는다. 어두운 색 니트에 잦게 올라온 보푸라기와, 어깨선을 타고 흐르는 머리카락 따위를 바라본다. 소녀는 문득, 날이 많이 추워졌음을 깨닫는다. 몸을 녹일 기세로 내리쬐던 열기는 사라지고, 쓸쓸한 바람만이 피부를 식히는 계절이 왔다. 두꺼운 옷자락이 등에 배겨서 그런가, 소녀는 자꾸만 뒤척거렸다.

 

루석은 내일이면 이 방을 나간다.

한동안 자리를 비운다고 했다.

 

책상 위에 놓인 두 개의 찻잔엔 더 이상 김이 피어오르지 않았다. 찻잔 바닥에는 자주 마셨던 차의 티백이 찌꺼기처럼 들러붙어 있을 터였다. 저번에 불쑥 방문했을 때 이후로 루석은 종종 이 차를 내왔었다. 마시고 빨리 가 그냥. 에이~너무하네. 그런 영양가 없는 대화를 나누며 마시던 차는 조금 썼던가? 얼마 되지 않은 일임에도 아주 오래전 일처럼 느껴졌다.

오래 전 일. 오래 걸리는 일. 소녀는 루석의 어깨너머를 힐끔 바라보았다. 종이는 아직도 텅 빈 백지였다. 요즘 시대에 누가 종이에 손글씨를 써요. 그것도 백지 한 장 덜렁 꺼내서 무드없게. 맹렬한 조언을 그렇게 한 귀로 흘리더니만, 저럴 줄 알았다. 평소라면 가감없이 내뱉었을 타박을 먼지 쌓인 공기와 함께 꿀꺽 삼켰다.

 

 씀벅씀벅, 소파에 누워있는 소녀의 눈이 침침해진다. 오늘 마신 차는 잠이 잘 오는 성분의 차였나보다. 눈을 꽉 감았다가 떠도, 고개를 몇 번 가로저어 봐도 끈적한 졸음이 귓가에 달라붙는다. 모든 것이 별의 노래처럼 아득해진다.

 

 “전구 갈아야겠는데.”

 

계속 입을 닫고 있던 루석의 첫 마디였다. 소녀는 느에? 하고 조금 느리게 대꾸했다. 가세요, 그럼. 툭 내뱉었던 소녀가 잠시 입술을 달싹이고는 어둡긴 해, 하고 곧바로 덧붙였다. 어감이 매몰찼나. 그런 걸 신경 쓸 사람이 아니긴 했다. 소녀는 귀를 기울였다. 그가 만약 갈아주실래요? 라던지, 지금 갈까요? 라고 덧붙였다면, 툴툴대면서도 몸을 일으켜 전구를 갈았을 것이다. 그녀의 몸에 밴 부지런함은 모두가 인정하는 부분이었으니까. 소녀는 흐려지는 정신을 다잡으며, 다음에 이어질 루석의 말을 기다렸다.

 

“짐 그대로 두고 가니까 가져갈 거 있으면 알아서 가져가세요.”

 

막상 루석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생각했던 답과 영 딴판이었다. 약간 벌어진 소녀의 입에서 얇은 숨이 새어 나왔다. 불쑥 방문해 사람을 놀래키는 일도, 별거 아닌 일에도 딴지를 걸어가며 깔깔댈 일도, 한동안은 영 흥이 나지 않겠구나 싶다.

 

“됐어요. 빈집 털어 뭐 해요?”

“그러게.”

 

루석은 공연히 찻잔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대화가 싱겁게 돌았다. 이곳에서 소녀는 어디까지나 손님이었다. 그렇다면 굳이 일어날 필요가 없겠구나. 소녀는 소파에 깊게 몸을 묻었다. 루석은 여전히 펜을 잡고 있다. 이따금 버릇처럼 볼펜을 손 위에서 가볍게 돌리기도 했다. 소녀는 망연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볼펜을 가볍게 딸각거리는 소리가 드문드문 들렸으나, 볼펜 촉이 종이에 스치는 소리는 끝끝내 들리지 않았다. 다시 이어진 정적 속에서 소녀는 눈을 깜빡였다. 눈을 감았다가, 뜨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깨어있기에 전등은 지나치게 어두웠고 날은 선선함을 넘어 서늘해지기 시작하는 대목이었으니까. 귓가에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만, 살갗에 가볍게 스치는 천의 감각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그제야 소녀는, 자신이 완전히 눈을 감아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아직 종이는 채워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식어버린 찻물 같은 대화가 찻잔 안에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눈을 다시 뜰 수 없었다.

 

잠들고 싶지 않다.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소녀가 생각한 건 단 하나였다. 세상이 변하고, 시대가 변하고, 내일이 와야 기약한 다음이 온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렇지만, 잠깐만. 아주 잠깐만 늑장을 부리고 싶어졌다. 소녀는 지나가지 않았으면 하는 순간을 붙잡듯, 손을 둥그렇게 모아쥐었다. 손안에 잠깐 잡혔던 두꺼운 옷깃이 스르르 빠져나간다. 거부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이란 그렇다. 다시 붙잡기엔, 너무 졸렸다. 소녀는 까무룩 존다. 완전히 잠에 빠져들려는 찰나, 방금 빠져나갔던 옷깃만큼의 두께와 질량을 가진 무언가가, 다시 손에 잡혔다. 소녀는 습관처럼, 손에 힘을 주어 그것을 붙들었다. 머리 위에서 바람 새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디서 들어오는 바람일까? 확실하지 않다. 옷깃을 제대로 잡았는지 확인하고 싶은데, 소리의 정체도 파악하고 싶은데, 졸음이 눈꺼풀을 짓눌러 떠지지 않는다. 분명히 얕다고 생각한 졸음이 도저히 소녀를 놔주지를 않았다. 여러 가지 상념들이 꿈결에 스치운다. 어렴풋이 잘 자라는 소리를 들었던가? 종이 위에 펜이 또각이는 소리와 헷갈린 걸까?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기는 건 바람이었던가? …모르겠다. 지금 당장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소파에 모로 누운 소녀를 제외한 모든 것이 조심스레 움직였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어두운 색채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흩날렸다. 소녀는 이 감각을 알고 있다. 둔하면서도 예민한 감각, 상념을 내려놓고 깊은 잠에 들어야 할 때가 왔다. 하지만, 조금만 더. 아직은 루석이 자리를 비우지 않았으니까. 소녀는 옷깃을 말아쥔 채 물기 어린 잠에 빠져들었다. 그 안에서도 소녀는, 루석의 무운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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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뿌직 스페셜이란?

: 앞뒤서사 고증 세계관 1도 신경 안 쓰고 정말 딱 보고싶은 장면만 A4 1-2장 분량으로 써제끼고 치워버리기 특집

 

삼성동 루비입니다. 와~!

삼성동을 듣고 난 후, 멜랑콜리한 감정에 젖어 써뒀던 단문이었는데 이제야 공개하게 되었네요.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아 폐기 직전까지 갔던 글이라, 조금 부끄럽네요..부디 가볍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별의 방문'을 읽고 난 후 읽으시면 또 다른 재미를 발견하실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항상 감사합니다. 루비 짱~!^^ 영원하라(제발)

* 저의 글은 공지사항(https://mintlatteis.tistory.com/notice/1)을 언제나 준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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