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뿌직 스페셜이란?
: 앞뒤서사 고증 세계관 1도 신경 안 쓰고 정말 딱 보고싶은 장면만 A4 1-2장 분량으로 써제끼고 치워버리기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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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로윈 루비
-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은데요.
비밀소녀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딕 풍의 화려한 망토를 입은 루석이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다. 빳빳한 목깃 안으로 자꾸 말려 들어가는 머리카락을 빼내는 루석의 모습을 보며 소녀가 작게 웃었다.
- 잘 어울리시는데요, 뭐.
- 아니, 애초에 망토 하나만 두른다고 뱀파이어가 되나요?
평소에도 워낙 시커멓게 하고 다니시니까. 뭐요? 소녀는 까르르 웃으며 모자를 고쳐 썼다. 끝이 뾰족한 모자를 장식한 주황색 리본이 앙증맞게 흔들리는 게 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 이 정도면 양반이죠. 옆 부서는 미라였어요~ 붕대를 세 통 넘게 쓰더라구요. 그것보단 낫지 않나요? 나중에 갈아입기도 편하고.
그냥 빨리 끝내고 퇴근하고 싶네요. 루석이 성큼성큼 걸어갔다. 벨벳 재질의 긴 망토가 루석의 등 뒤에서 펄럭였다. 나름 그럴듯한데 괜히 저러시네. 소녀는 자꾸만 흘러내리는 모자를 슬쩍 잡아 들어 올리고는 루석의 등 뒤를 따라나섰다. 신화와 전설 속 괴물들과 유명한 캐릭터들로 변장한 사람들이 잔뜩 웃고 떠들며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날. 할로윈이다. 소녀는 아이들의 바구니에 다리 없는 중년 여자가 슬쩍 사탕을 집어넣는 것을 모르는 척했다. 오늘만을 손꼽아 기다려 온 그들의 하루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들 또한 우리를 눈치채지 않았으면 해서 이런 불필요하고 우스꽝스러운 변장까지 해온 거니까.
문을 활짝 연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시끄러운 음악들이 귀를 멍멍하게 울렸다. 매캐한 담배 냄새와 숯불로 구운 고깃덩어리 냄새,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와 술에 취해 내뱉는 욕지거리와 환호성이 한데 뒤섞여 싸늘한 밤거리를 데웠다. 현실 세계에 실존하지 않는 것의 외피를 덮어쓴 사람들의 생기를 구경하는 일이 꽤 즐거웠다. 누군가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보다 세네 발자국 앞서 성큼성큼 걸어가는 저 남자는 분명히 정신없고 시끄럽다고 할 테지만.
두근, 두근.
- 시계 소리다.
소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루석은 어느새 소녀의 옆에 서 있었다. 왁자지껄한 거리의 소음 속, 두 사람은 멈춰 선 채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소음은 잦아들고 하나의 소리만이 선명하게 들렸다. 멈추기 직전 시계가 격동하는 소리. 한 사람의 생명이 꺼져가는 소리. 업무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초침과 분침이 완전히 겹쳐지기 전 그를 찾아가 이름을 부르면, 그의 세계는 격변할 것이다.
- 출발하죠.
루석은 목깃 안으로 말려 들어간 머리카락을 빼내기 위해 팔을 들었다. 망토 안으로 드러난 검은 정장이 눈에 띄었다. 반짝거리는 얇은 망토 아래 감춰져 있는 소녀의 옷과 완전히 동일한 복식이었다. 소녀는 괜히 모자를 한번 고쳐 썼다.
- 이 순간은 겪을 때마다 맘이 좀 그래.
- 비소님이 저보다 오래 하지 않았나요, 이 일.
- 기간이랑 별개로요.
그런가요. 루석은 덤덤하게 대꾸하고는 장부를 한 번 체크했다. 아까보다 걷는 속도는 좀 늦춘 채였다. 루석과 발맞춰 걸으며 소녀는 괜히 몇 마디를 더 늘어놓았다.
- …할로윈은 유독 짧고 빠르게 지나가네요.
- 바로 다음이 크리스마스 시즌이니까.
- 큰 거 가고 더 큰 거 온다. 이거죠?
- 그것도 있고. 죽은 사람을 굳이 오래 기념할 필요는 없죠.
- 와, 너무해! 우리도 따지고 보면…
- 이미 넘어간 사람은 추억으로 남는 게 맞아요.
- ……그렇죠.
소녀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늘이 끝나면, 깊어가는 밤이 지나고 어슴푸레하게 날이 밝아오면, 죽음을 기리는 날은 끝나고 누군가의 탄생을 기리는 기념일이 시작될 것이다. 망자들은 새로 태어날 생명을 기대하며 들뜨기 시작하는 생자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희미해져 가겠지. 익숙해질 법도 한데, 매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직은 생과 사가 엉망으로 섞여 있는 이 거리 위에 서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소녀는 생각했다. 아유 왜 이런담? 오늘따라 감성적이네요, 제가. 괜히 들떠서는. 소녀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너스레를 한 번 떨었다. 루석은 말없이 소녀를 바라보다가, 모자를 한 번 툭 쳤다. 위태위태하게 걸쳐져 있던 모자가 스르르 흘러내려 소녀의 시야를 완전히 가렸다.
- 아 뭐에요!
- 머리 작아 보이려고 일부러 사이즈 큰 거 고른 거 아니시죠?
- 뭐래 진짜!
죽고 싶냐 해루석? 응 안 죽어~. 루석을 몇 대 툭툭 친 소녀가 씨근거리며 모자를 들어 올렸다. 소녀가 제대로 모자를 고쳐 쓴 걸 확인한 루석이 건널목을 향해 가볍게 턱짓했다.
- 소리가 점점 커지는 걸 보니까 저긴가 본데. 서두르죠.
- 그래요. 빨리 끝내고 퇴근해요.
루석과 소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누군가가 이승에서 보낼 시간을 멈추기 위해 그들은 분주히 움직였다. 죽음을 앞둔 자들에게는 심기 불편한 뱀파이어보다, 감성적인 마녀보다 더 무시무시할 존재일 그들. 저승의 인도자인 그들의 업무가 그제야 시작되었다.
쓰게 된 계기 : 자고 일어났는데 심장이 겁나 뛰는거임..그걸 비몽사몽간에 듣고 있자니 심장 뛰는 소리는 시계 초침이 똑딱거리는 소리랑 비슷하구나..하는 생각이 듬
저승사자들이 지상에서의 시간을 멈추러 다니는 존재니까..할로윈 시즌+파트너인 루비랑 엮어서 쓰면 재밌겠다고 생각함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