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지 않는 것

민토minto 2025. 1. 8. 19:53

 

 

 

 

 

오늘의 일이 끝났다. 루석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얀 입김이 고요한 거리 위로 피어올랐다. 요 며칠 기온이 뚝뚝 떨어지더니만, 이제는 언제 눈이 와도 이상하지 않을 날씨가 됐다. 같은 일상을 반복하며 살다 보니 시간이 흐른 줄도 몰랐다. 이러다 보면 또 다음 해가 성큼 다가오겠지. 그는 코트를 여미며 가볍게 몸을 떨었다.

 

“다 됐나요?”

 

한참 추워하던 그에게 누군가 말을 붙여 왔다. 이미 닫힌 가게 문 앞에서 계속 서성이던 사람이었다. 갑작스럽게 말을 걸어왔음에도, 루석은 놀라지 않았다. 평온한 표정으로 안경을 한 번 고쳐 쓴 루석이 인영을 향해 몸을 돌렸다.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익숙하고 단조로운 대답이 툭, 입에서 흘러나왔다. 네.

 

 

“갈까요?”

 

 

 

 

 

변하지 않는 것

 

 

 

 

 

비밀소녀는 루석 바에 매일 오는 손님은 아니었다. 기억에 남을 만큼 특별한 메뉴를 시키거나 인상 깊은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다. 굳이 특이점을 끌어내자면…한번 올 때마다 가장 늦은 시간까지 남아있는 손님이긴 했다. 그녀는 어느 순간 홀연히 나타나서 그가 가게를 마감할 때까지 자리에 머무르곤 했다. 밤길은 어둡고 꽤 선득했으므로, 루석은 은근슬쩍 생긴 퇴근 메이트를 나쁘지 않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직도 그녀가 뭘 하느라 그 시간까지 돌아다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늦은 새벽, 깜빡거리는 가로등 불빛을 따라 침묵이 서리처럼 내려앉은 길목을 걸어간다. 가게 입구에서 나온 뒤 좁은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도로와 이어진 큰길이 나온다. 루석은 그곳으로 콜택시를 부르거나, 지나다니는 택시를 잡아 퇴근하곤 했다. 가게 앞부터 도로 앞까지. 산책이라도 하기에도 민망한 짧은 거리에서 보낸 시간이 쌓이고 쌓여, 그들은 한나절이 꼬박 넘는 기간을 같이 걸어온 사이가 되었다. 루석은 그 사실이 새삼 피부로 와닿는 듯했다. 이따금 개 짖는 소리나 들려오던 거리에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포개졌다.

 

 

 

“점점 추워지네요.”

“새벽이라 그런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더웠던 것 같은데,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가는지 모르겠어요.”

“그러게요.”

 

 

서늘한 바람이 잡담을 나누던 두 사람을 스치고 지나갔다. 볼을 감싼 채 걸어가던 소녀가 순간 아! 하고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

“닫았네….”

 

소녀가 무언가를 가리켰다. 루석은 소녀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깔끔한 디자인의 가게 하나가 ‘임대문의’ 간판을 단 채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카페였던가? 출근길에 몇 번 여기서 커피를 샀던 것 같기도 하고. 가구가 빠져 텅 비어버린 가게 안을 쳐다보는 동안 소녀가 말을 이었다.

 

“여기 케이크 디게 맛있었거든요.”

“자주 오셨었나 봐요.”

“가끔요. 정들었었는데, 아쉽다.”

“…원래 여기가 자주 바뀌긴 해요.”

 

이 상권에서 꽤 오래 버티며 장사를 해온 루석의 입장에서, 주변 가게가 갑작스레 문을 닫는 건 놀랄만한 사건이 아니었다. 온갖 종류의 가게들이 들어섰다가 버티지 못하고 사라지는 일이 부지기수로 많았다. 다양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밀려 들어왔다가, 얼굴도 잘 모르는 타인이 되어 스쳐 지나간다. 그들 중 몇몇은 개업 홍보 겸 루석 바를 들렀을지도, 손님으로 방문해 매출을 올려줬을지도 모르지. 솔직히, 크게 신경쓰이지 않는 일이었다.

 

“변하지 않는 건 없네요….”

 

가볍게 내뱉은 말끝이 흐릿했다. 루석은 가로등 아래 가만히 선 채 발걸음을 떼지 않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눈동자에 담겨 있던 주홍색의 불빛이 물결처럼 흔들리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사위가 조용했다. 루석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저랑 비소님도 그렇잖아요.”

 

 

소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의문이 담긴 시선이 닿기도 전에, 그가 빠르게 한 마디 덧붙였다.

 

“처음에 비하면 많이 변했죠. 다들.”

“…그렇긴 하네요.”

 

 

소녀는 동의했다. 반으로 땋아 묶은 머리를 고정해 둔 리본 핀이 고갯짓에 따라 흔들거렸다. 처음 만나 대화를 나눴을 때, 그녀를 낯설어하던 기억이 선명했다. 새로운 만남의 시작은 당황스러움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양극단에 있는 행성들처럼 섞이지 못하던 그들이 서로를 알아갈 때까진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외형부터 말투, 사소한 버릇이 더 이상 낯설지 않아졌을 때, 그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의 우리가 얼마나 투박하고 서툴렀었는지, 예전에 비해 얼마나 서로에게 익숙해졌는지도.

 

“아무래도 시간이 지나다 보면 변할 수밖에 없잖아요.”

“네에.”

“변화가 있어야 발전도 있고, 뭐 그런 거죠.”

“그래도…잘 살펴보면 하나쯤은 있을지도요.”

“뭐가요?”

“변하지 않는 게요.”

“…그렇겠죠.”

“…아니, 아니다. 없으려나?”

“대답한 내가 뭐가 되니 비소야.”

 

소녀가 푸스스 웃었다.

 

“많은 것이 결국 변해버리니까요. 모습도, 계절도, 마음도요.”

 

마음도. 루석은 마지막 한 마디를 곱씹었다. 소녀는 꼼꼼하게 둘러맨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으며 시선을 내렸다. 임대 문의 네 글자 뒤편의 무언가를 읽어내려 했던 건지, 더 이상 맛볼 수 없게 된 케이크의 레시피라도 찾았던 건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긴 소녀는 한참 동안 말이 없다. 뭔가 더 이야기하는 게 좋을까. 루석이 고민하고 있을 때쯤 그녀의 입가에서 들릴 듯 말 듯한 속삭임이 흘러내렸다.

 

“그래도 이 순간만큼은, 남아있겠죠.”

“…순간도 시간이 지나면 바뀔텐데.”

“바뀌죠. 그래도, 제가 그 순간을 믿었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금방 변해버릴 순간을 믿는 행위는 바보 같다. 하지만, 그렇게 나쁘진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순간이 모여 시간이 되고, 시간이 모여서 계절이 되는 법이니까. 그는 자신의 안에 포개져 있을 수많은 순간에 대해 생각했다. 분명 오늘의 대화도 천천히 내려와 겹겹이 쌓여있는 기억들의 가장 위에 내려앉겠지. 매서운 바람이 두 사람을 스치고 지나갔다. 정말로, 곧 눈이 올지도 모르겠다.

아유, 추워라. 얼른 갈까요? 소녀가 제안했으므로, 루석은 생각을 끊어내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일정한 발소리가 잠시 멈췄다가, 이어졌다. 예전에는 다소 넓은 폭으로 엇갈려오던 소리였었지. 그는 발걸음이 꽤 빨랐고, 소녀는 그런 자신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오곤 했다. 다리가 짧아서 그러신 거라고 놀렸다가 몇 대 맞을 뻔도 했었던가. 뒤처질 때마다 ‘확 날아다닐 수도 없고!’ 하며 입버릇처럼 투덜대던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요샌 날아다닌다는 말을 하지 않으시네요.”

“어머, 그러게요. 급하게 돌아다닐 필요가 없어서 그런가.”

 

소녀는 눈을 한 번 굴리더니 덧붙였다.

 

“매번 저한테 맞춰 걸어주시니까요.”

“….”

“모두가요.”

“모두가.”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진심이 느껴지는 소녀의 말에 루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작게 미소 지은 소녀가 그보다 한 발자국 앞서서 걸어나갔다. 최근 소녀의 뒷모습을 보는 일이 많아졌다. 그는 요새 왜 이렇게 느려터지게 걷냐는 주변인들의 핀잔을 머릿속에 떠올렸다가 밀어냈다. 아까부터 강하게 불어대는 바람 때문인지, 소녀의 머리카락이 조금 헝클어진 게 보였다. 그는 무심결에 손을 뻗었다. 주홍색과 연노랑색이 뒤섞인 채 엉켜있는 머리카락 끝을 손끝으로 가볍게 빗어 내렸다. 금방 풀릴 것 같은데. 손을 조금 더 위로 올리려는 순간 소녀가 몸을 돌렸다. 루석의 손가락 사이로 소녀의 머리카락이 노을 진 해변의 모래처럼 빠져나갔다. 그는 뒤돌아 자신을 바라보는 소녀를 향해 뻘쭘하게 손을 들어 보였다. 그녀가 소리 내어 웃었던 것도 같았다. 때마침 나타난 도로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가 요란했으므로 확실하진, 않지만.

 

 

 

 

 

 

“다 왔네요.”

 

 

소녀는 다가오는 택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서로 먼저 타시라는 약간의 실랑이가 벌어진 후에, 루석이 떠밀리듯 꾸역꾸역 택시로 밀어넣어졌다. 제 걱정은 마시고 얼른 들어가세요. 유리창 너머로 손을 흔들던 소녀가 덧붙였다.

 

 

“다음에 또 봬요.”

 

 

택시가 모퉁이를 돌자, 계속해서 손을 흔들던 인영이 스며들 듯 사라졌다. 루석은 시트에 몸을 깊게 묻었다. 이 시간대엔 항상 피곤에 절어있던 그였지만, 지금은 왠지 잠들 수 없었다. 루석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뚜렷이 곱씹을 수밖에 없는 찰나에 대해 생각했다. 심야의 택시가 흘러나오는 노래와 함께 어둠을 가르며 오랫동안 달렸다. 모든 것이 지나가도 변하지 않고 남아있을 순간이란 이런 걸까. 그는 손바닥을 꾹 말아 쥐고는, 그제서야 눈을 감았다. 어느새 흩뿌리기 시작한 진눈깨비가 아무도 없는 거리 위로 조용히 쌓여갔다.

 

 

모종의 이유로 2023년도에 써뒀던 글을 공개하게 되었습니다! 와~!

지금의 두 사람과 다른 해석을 보는 재미도 있으시리라 생각해요.

(저도 작년 말에 갑자기 소녀가 플라잉 마법소녀로 재등장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즐겁게 읽어주신다면 기쁠 것 같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 저의 글은 공지사항(https://mintlatteis.tistory.com/notice/1)을 언제나 준수합니다.